피리는 후량을 건국한 여광(呂光)에 의해 384년 구자국이 함락된 후 중원에 유입된 구자의 관악기로, 아시아 전 지역으로 퍼져나간 서역의 겹서악기이다. 슬픈 음색을 가지고 있어 “悲篥”이라고도 하였는데, 수와 당나라의 음악지에서는 ‘비리’ 혹은 ‘피리’라고 부르던 서역의 악기명을 음차하여 ‘篳篥’, ‘觱篥’, ‘必篥’ 등 여러 형태로 기록하였다. 이 한자가 악기와 함께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악기명의 변화가 발생하였는데, 일본에서는 피리를 ‘篳篥’의 일본식 발음인 ‘히치리키’로 불렀고, 중국에서는 주선율 악기라는 뜻을 담은 별칭 ‘頭管’으로 기록하다가 현재는 ‘관자’라 부른다. 한반도에서는 ‘觱篥’이라 기록했으나 한국식 한자 발음인 ‘필률’보다는 서역의 발음 그대로 ‘피리’로 불렀다. 20세기 이후에는 한글이 상용화되는 과정에서 笛, 簫, 觱篥 등의 한자가 모두 ‘피리’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피리’라는 용어는 ‘부는 악기의 통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수(隨)와 당(唐)의 음악지에 기록된 피리는 5세기를 전후하여 구자, 소륵, 안국, 고창, 천축, 서량, 고구려 등 여러 나라에서 사용하는 국제적 악기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고구려악에 사용된 피리 관련 기록을 보면, 그 종류로 대피리(大篳篥), 소피리(小篳篥), 도피피리(桃皮篳篥)가 있다. 이 중 도피피리는 고구려와 남만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악기로 기록되어 있으며, 송나라 고취(鼓吹) 악대에 편성되기도 하였다. 피리는 통일신라의 ‘삼현 삼죽’ 편성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통일신라시대 범종에 새겨진 피리의 조각상과 『 고려사(高麗史)』, 『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그 존재가 확인됨으로써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지속적으로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 사용한 피리는 고구려에서 사용했던 ‘대피리, 소피리, 도피피리’와 같이 외형적 특성을 기준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악의 성격에 따라 분류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당악(唐樂)에 속한 피리는 9공, 속악(俗樂)에 속한 피리는 7공으로 구분되어 있어 악기의 제도에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 당악에 편성된 9공의 피리는 문종 30년(1076)에 둔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에 필률업사(篳篥業師)에 관한 기록과 관련이 있고, 예종 9년(1114)에 송나라에서 들여온 신악기(新樂器)에 속하는 피리와 관련이 있다. 이 악기가 새로 유입됨에 따라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연주되었던 피리와 구분이 생겼다.
조선 시대에는 당피리(唐觱篥), 향피리(鄕觱篥)라는 용어를 통해 피리를 구분하였다. 피리에 관한 상세한 도상과 정보를 담고 있는 『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살펴보면, 당피리와 향피리는 그 제도에 있어 차이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당피리는 고려의 9공 당피리에서 실제 음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아랫후공을 하나 없앤 8공으로 변화되었다. 아악 12율의 첫 음인 황종〔合字聲〕이 전폐음을 연주하는 7관에 배치되어 있으며, 마디가 있는 황죽과 신우대로 겹서를 삼아 악기를 제작하였다. 다음으로, 향피리는 대금과 동일하게 6관을 가진 형태에서 전공의 갯수를 하나 늘려 당피리와 동일하게 7관의 악기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연주자들이 구전심수한 향피리의 연주법에서 대금과 관수를 동일하게 6관으로 맞추어 “피리를 치켜잡아” 연주하는 방식이 존재한다. 따라서 조선의 향피리는 기존 6관 피리 주법을 유지하면서도, 7관 주법을 연주할 수 있도록 확장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피리를 치켜잡아 6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악곡에는 취타, 자진한잎, 관악영산회상, 대풍류 등이 있으며, 내려 잡고 7관 연주법으로 연주하는 악곡에는 관현편성으로 연주하는 수연장, 평조회상, 여민락 등이 있다. 마디가 없는 신우대로 관대와 서를 모두 제작하였으며 ‘宮’의 위치가 3관에 배치된 특성이 있다. 향피리는 음량을 줄인 형태로 풍류방용 피리로 변형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세피리라 부른다.
피리계 악기는 국가마다 지공의 수나 재료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겹서(double reed)를 지공이 있는 관대에 끼워서 종적 형태로 연주하는 최소 형태를 가졌을 때, 그것을 피리계 악기로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전해진 또 다른 겹서 악기에 태평소가 있으나, 태평소나 중국의 쉐나이와 같은 악기들은 피리계 악기에 비해 좁은 너비의 리드를 사용한다. 피리계 악기의 리드들은 넓고 커서 연주가 까다로워 전문집단에서 강한 입술근육 훈련을 받아야 연주가 가능한 특성이 있다.
특히 한반도의 피리는 갈대가 아닌 밀도가 높고 단단한 신우대로 만든 리드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서’라고 부른다. 서와 관대를 만드는 재료는 좋은 토양의 양지바른 곳에서 약 4개월간 채취를 할 수 있는데, 그 기간은 11월부터 2월 말까지 4개월간이다. 재료는 길이가 4.5m~8.5m가 가장 좋고 또 굵기는 12.5 ~14.5㎜ 를 선택한다. 3년에서 6년 정도 밭에서 묵힌 후 베어 통풍이 잘되고 그늘진 곳에서 1년에서 2년 정도 자연 건조를 시킨 다음에 제작한다.
피리는 국악기 중 비교적 큰 음량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무대라는 개념이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20세기 이전까지 야외 행사에서 효과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궁중의 제례악, 연례악, 군례악 전반에서 주선율을 담당하였으며 관아와 민간의 잔치에서도 선율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삼일유가와 회갑연과 같은 잔치의 행진, 춤 반주, 노래 반주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관악영산회상, 취타, 자진한잎과 같은 악곡을 연주하였다. 이처럼 피리는 궁중과 민간에서 폭넓게 사용된 악기로, 각종 합주 음악에서의 주요한 역할을 기반으로 현재까지 주요 국악기 중 하나로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연주되었던 당피리, 향피리, 세피리의 전승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근대식 교육이 도입되고 양악이 유입되면서 계급에 따라 분리, 전승되었던 조선의 연례, 제례, 풍류방, 관속 음악 등은 모두 뒤섞이게 된다. 이 시기에는 조선의 관속 음악이 급속도로 축소되었고 피리 연주자의 수도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피리를 교육하는 유일한 관속 기관이었던 이왕직 아악부에서는 격에 따라 구분이 있었던 피리를 한 사람이 모두 학습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피리 연주자들은 당피리, 향피리, 세피리 모두를 학습하게 되었고, ‘보존’에 목표가 설정되면서 구전으로 전승되던 피리곡 전반이 악보로 정리되고 정형화되는 변화를 겪게 된다.
민간의 피리연주자들은 회갑연, 마을굿 등에서 수요가 있었던 거상악이나 춤과 노래의 반주를 담당하며 기능 음악의 즉흥성을 유지하였으나, 수요가 없는 곡은 연주하지 않으면서 특정 악곡만 전승하게 되었다. 이에 이왕직 아악부에 의해 정리된 피리 음악은 정악으로, 민간 연주자들이 전승한 피리 음악은 민속악으로 재편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에서는 양악식 오케스트라의 영향을 받아 민족배합관현악단 혹은 국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관현악에서는 화성적 구조를 적극 활용하였기 때문에 중음역대인 피리의 음역확대를 위해 대피리, 고음피리 등이 새로 고안되었다.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의 결합에 적극적이었던 북측에서는 피리 관대의 재질을 신우대에서 단단한 과일나무로 바꾸고, 키를 달아 개량 대피리, 저피리, 소피리를 선보였다. 남측에서는 기존의 음색을 유지하고자 비교적 소극적인 개량이 이루어졌으며 최소한의 키를 부착한 대피리와 고음피리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한의 국악관현악단에서는 남측에서 개발한 대피리, 고음피리 외에도 북한의 개량 대피리, 저피리를 수용하여 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