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순(子淳), 호는 혜포(惠圃) 또는 국포(菊圃)이며, 1690년(숙종 16)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강석훈(姜碩勛), 어머니는 병조참의와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낸 이서우(李瑞雨)의 딸이다. 족부(族父) 강석번(姜碩蕃)에게 입양되었다.
강박은 1715년(숙종 41) 3월 절일제(節日製)에서 수석을 차지하였고, 5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있으면서 동료 김홍석(金弘錫)에게 윤증(尹拯)을 옹호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비판한 편지를 보낸 일로 인해 탄핵을 받고, 평안남도 안주(安州)에 유배되었다가 1719년(숙종 45) 8월에 해배(解配)되었다.
경종 즉위 후인 1722년(경종 2) 예조좌랑, 병조좌랑, 영양현감 등에 제수되었다. 1724년(영조 원년) 부수찬 ·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사직 상소를 올리며 나학천(羅學川), 김시빈(金始鑌) 등을 탄핵하였다. 1726년에는 오광운(吳光運) 등과 함께 당시 소론에 대한 엄단(嚴斷)을 요구하였던 임징하(任徵夏)를 비판하였다.
정미환국(丁未換局)이 일어난 후 1727년 수찬에 제수되었다. 경연에 검토관으로 참여하여 1721년(경종 원년) 신임옥사(辛壬獄事) 당시에 사형을 당한 윤지술(尹志述)을 비판하다 영조로부터 당습(黨習)에 젖은 말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결국 파직되었다. 수찬, 교리 · 필선 · 함종부사 등에 제수되었다. 1728년 친외할아버지 이서우의 첩자(妾子) 이순관(李順觀)이 이인좌의 난에 연관되자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진주목사 · 홍주목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대북 계열의 후손으로서 남인 중에서도 청남(淸南)에 속하여 그 정치적 입장을 지지하며 노론과 대립하였다.
허목(許穆) 이후의 제일인자로 평가될 정도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이며, 정(精)을 통한 질(質) · 문(文) · 진(眞) · 박(朴)을 추구하는 특유의 시세계를 정립하였다. 정치적으로 소외된 말년에는 현실의 고뇌와 정치적 좌절을 시로 풀어내기도 하였다. 특히 수차례의 시사(詩社) 활동으로 오광운(吳光運) 등 남인 문인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불우하였던 소론 계열의 문인들과도 폭넓게 교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오상렴(吳尙濂) · 채팽윤(蔡彭胤)을 계승하여 이헌경(李獻慶) · 정범조(丁範祖) · 채제공(蔡濟恭)으로 이어지는 시맥(詩脈) 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는 『국포집(菊圃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