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고령 지산동 45호분은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대가야 지배층의 여러널무덤이다. 고령군 서편에 위치한 주산(主山)의 남쪽 능선상에 위치한 최대형·최고위계의 고분 중 하나이다. 내부는 중앙에 대형 석실 2기를 설치하고, 그 둘레에 11기의 소형 돌덧널을 원형으로 배치하였다. 이 분묘에는 주인공을 위하여 1호 돌방에 2인, 2호 돌방에 1인, 주변 석곽에 9인, 도합 12인의 순장자가 함께 매장되었다.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45호분은 고령지역에서 최대형급에 속하는 것으로 순장풍습이 성행했던 대가야의 전성기에 속한다.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대가야 지배층의 여러널무덤. 다곽분.
개설
내부구조는 중앙에 대형 석실 2기를 동북에서 서남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둘레에 11기의 소형 돌덧널을 원형으로 배치한 여러널무덤이다. 전체 외곽에는 할석을 이용하여 긴 지름 23.5m, 짧은 지름 22.0m의 타원형의 둘레돌(호석)을 돌렸고, 경사가 급한 남쪽에는 암반을 깎아 계단식으로 2, 3단 쌓고 있다. 봉토는 묘역의 낮은 곳으로부터 수평으로 사질토와 점토를 번갈아 다져 쌓아올렸으며, 규모는 긴지름 28.2m, 짧은지름 25.7m, 높이는 1호 돌방 뚜껑돌 윗면에서 2.85m를 보이고 있다.
내용
북쪽에 있는 1호 돌방의 규모는 길이 7.15m, 너비 1.64m, 깊이 1.85m이다. 돌방 내부로부터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각종 꾸미개 · 청동거울조각 · 각종 무기류 · 비늘갑옷[札甲]조각 · 마구류 · 관못 · 꺾쇠 및 대형 목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회색경질토기가 나왔다. 관못 · 꺾쇠의 존재로 보아 주인공은 나무널에 안치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며, 주인공의 머리부분과 발치의 양끝에서 금제 귀고리와 유리제 목걸이[頸飾]를 패용한 동북침의 인골이 각각 발견되었는데, 그 위치로 보아 순장자로 보인다.
남쪽에 있는 2호 돌방은 1호 돌방보다 규모가 작아 길이 4.88m, 너비 1.50m, 깊이 1.77m이다. 내부에는 동북쪽 끝에 치우쳐 1호 돌방의 것과 똑같은 금제 귀고리와 유리구슬 목걸이를 한 동북침의 인골 흔적이 있고, 서남쪽에는 목항아리와 단지 등 대형토기가 각각 10개씩 도합 20개가 한 곳에 모여 있어 껴묻거리방의 성격을 보인다. 2호 돌방의 피장자 역시 창고지기 역할의 순장자로 보인다.
석실을 둘러싸고 있는 돌덧널들은 경사가 급한 남쪽과 동남쪽에는 돌방과 높낮이를 달리하여 계단상으로 암반을 파거나 다듬은 상태 위에서 축조하였다. 축조재료를 기준으로 분류하면, 네 벽 모두 얇은 판석으로 되어 있는 것(4기), 할석으로만 되어 있는 것 (6기), 할석으로 쌓은 외곽 안에 판석으로 짠 석관을 안치한 것(1기) 등이 있다. 돌덧널의 뚜껑으로는 돌방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판석모양의 장대석 여러 매를 잇대어 덮고 있다. 돌덧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아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길이 2.10∼2.90m, 너비 0.40∼0.90m, 깊이 0.30∼0.80m 범위 안에 있다.
특징
이들 돌덧널의 피장자는 돌방의 주인공을 위한 순장자로 보이는데, 그 근거로는 다음과 같다. ① 돌덧널의 규모나 껴묻거리의 내용이 돌방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비하다는 점, ② 돌덧널의 배치상태가 돌널을 중심으로 한 원주상의 주변적 · 종속적인 배열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 ③ 더욱이 신분상의 격차를 보이는 주인공과 여타 피장자가 동시에 매장되었다는 점, ④ 이 고분이 순장묘의 성격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지산동 제44호분의 내부구조와 매장모습이 흡사하다는 점이다.
결국 이 분묘에는 주인공 1인을 위하여 1호 돌방에 2인, 2호 돌방에 1인, 주변 석곽에 9인(11기의 돌덧널 중 2기는 매장흔적이 없었음), 도합 12인의 순장자가 주인공과 함께 매장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45호분은 고령지역에서 최대형급에 속하는 것으로 대가야의 전성기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고, 32∼35호분 등의 중형분의 확대발전형으로 중형분의 연대보다 약간 늦은 시기인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 전대에 있었던 순장풍습이 더욱 성해져 45호분과 같은 경우는 12명 이상의 순장자를 희생시킬 정도의 정치력, 경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6세기 초가 되면 공주지역의 백제와 신라 사이에 군사적 각축전이 낙동강 상류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그 당시의 백제의 영향 하에 고령의 대가야에는 횡혈식 석실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소개되어 일부 채용된다. 그러나 6세기 후반(562년)에는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그 지배층의 분묘인 수혈식 석실분이나 횡혈식 석실분 등의 대형분의 축조는 소멸된다.
참고문헌
- 『고령지산동고분군』(계명대학교박물관, 1981)
- 『대가야고분발굴조사보고서』(고령군, 1979)
- 『대가야 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경북대학교 박물관, 1978)
- 「대가야고분의 편년 검토」(김두철, 『한국고고학보』제45집, 2001)
- 「대가야 묘제의 편년연구 ·고려 지산동 고분을 중심으로·」(김종철, 『한국학논집』9집,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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