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지산동 45호분 ( )

고령 지산동 고분군 중 45호분
고령 지산동 고분군 중 45호분
선사문화
유적
국가유산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대가야 지배층의 여러널무덤. 다곽분.
이칭
이칭
고령 지산동 고분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고령 지산동 고분군(高靈 池山洞 古墳群)
분류
유적건조물/무덤/무덤/고분군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사적(1963년 01월 21일 지정)
소재지
경북 고령군 고령읍 지산리 산8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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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에 있는 삼국시대 대가야 지배층의 여러널무덤. 다곽분.
개설

고령군의 서편에 위치한 주산(主山)의 남쪽 능선상에 대규모 고분군이 있는데, 그 중 최대형 · 최고위계(最高位階)의 고분 중의 하나가 바로 45호분이다. 1977년 12월경북대학교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였다.

내부구조는 중앙에 대형 석실 2기를 동북에서 서남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둘레에 11기의 소형 돌덧널을 원형으로 배치한 여러널무덤이다. 전체 외곽에는 할석을 이용하여 긴 지름 23.5m, 짧은 지름 22.0m의 타원형의 둘레돌을 돌렸고, 경사가 급한 남쪽에는 암반을 깎아 계단식으로 2, 3단 쌓고 있다. 봉토는 묘역의 낮은 곳으로부터 수평으로 사질토와 점토를 번갈아 다져 쌓아올렸으며, 규모는 긴지름 28.2m, 짧은지름 25.7m, 높이는 1호 돌방 뚜껑돌 윗면에서 2.85m를 보이고 있다.

내용

2기의 돌방과 11기의 돌덧널을 내장한 이 고분은 돌방을 중심으로 한 돌덧널이 원형을 이루고 있고, 그 전체를 덮고 있는 봉토의 단면에 흐트러지지 않은 수평의 판축층이 나타난다. 아울러 여러 돌널에서 출토된 유물 상호간의 형태변화가 전혀 없는 점 등으로 보아 매장자들이 동시에 매장된 무덤임을 알 수 있다. 2기의 돌방은 모두 암반을 깊게 파고 네 벽을 큼직한 할석으로 쌓아올린 구덩식 구조로, 돌방 뚜껑으로는 커다란 판석 8매를 잇대어 덮고 있다.

북쪽에 있는 1호 돌방의 규모는 길이 7.15m, 너비 1.64m, 깊이 1.85m이다. 돌방 내부로부터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각종 꾸미개 · 청동거울조각 · 각종 무기류 · 비늘갑옷[札甲]조각 · 마구류 · 관못 · 꺾쇠 및 대형 목항아리를 비롯한 각종 회색경질토기가 나왔다. 관못 · 꺾쇠의 존재로 보아 주인공은 나무널에 안치되어 있던 것이 분명하며, 주인공의 머리부분과 발치의 양끝에서 금제 귀고리와 유리제 목걸이[頸飾]를 패용한 동북침의 인골이 각각 발견되었는데, 그 위치로 보아 순장자로 보인다.

남쪽에 있는 2호 돌방은 1호 돌방보다 규모가 작아 길이 4.88m, 너비 1.50m, 깊이 1.77m이다. 내부에는 동북쪽 끝에 치우쳐 1호 돌방의 것과 똑같은 금제 귀고리와 유리구슬 목걸이를 한 동북침의 인골 흔적이 있고, 서남쪽에는 목항아리와 단지 등 대형토기가 각각 10개씩 도합 20개가 한 곳에 모여 있어 껴묻거리방의 성격을 보인다. 2호 돌방의 피장자 역시 창고지기 역할의 순장자로 보인다.

석실을 둘러싸고 있는 돌덧널들은 경사가 급한 남쪽과 동남쪽에는 돌방과 높낮이를 달리하여 계단상으로 암반을 파거나 다듬은 상태 위에서 축조하였다. 축조재료를 기준으로 분류하면, 네 벽 모두 얇은 판석으로 되어 있는 것(4기), 할석으로만 되어 있는 것 (6기), 할석으로 쌓은 외곽 안에 판석으로 짠 석관을 안치한 것(1기) 등이 있다. 돌덧널의 뚜껑으로는 돌방과 마찬가지로 두꺼운 판석모양의 장대석 여러 매를 잇대어 덮고 있다. 돌덧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아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길이 2.10∼2.90m, 너비 0.40∼0.90m, 깊이 0.30∼0.80m 범위 안에 있다.

특징

껴묻거리의 종류와 수량에도 차이가 있으나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철제품으로는 장도(粧刀)가 거의 곽마다 나오고 있다. 드물게는 은제 버드나무잎사귀형[柳葉形]귀고리나 금제 고리형[環形]귀고리가 보이고 있다. 토기의 종류에는 굽다리접시 · 목항아리 · 그릇받침있는 손잡이 달린 작은 항아리[有臺把手付小壺]의 3종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어 거의 모든 덧널마다 나온다.

이들 돌덧널의 피장자는 돌방의 주인공을 위한 순장자로 보이는데, 그 근거로는 다음과 같다. ① 돌덧널의 규모나 껴묻거리의 내용이 돌방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비하다는 점, ② 돌덧널의 배치상태가 돌널을 중심으로 한 원주상의 주변적 · 종속적인 배열상을 보이고 있다는 점, ③ 더욱이 신분상의 격차를 보이는 주인공과 여타 피장자가 동시에 매장되었다는 점, ④ 이 고분이 순장묘의 성격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 지산동 제44호분의 내부구조와 매장모습이 흡사하다는 점이다.

결국 이 분묘에는 주인공 1인을 위하여 1호 돌방에 2인, 2호 돌방에 1인, 주변 석곽에 9인(11기의 돌덧널 중 2기는 매장흔적이 없었음), 도합 12인의 순장자가 주인공과 함께 매장된 것이다.

의의와 평가

고령지산동고분군에서 44호분과 더불어 45호분을 가장 늦은 시기로 편년하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이 시기에 고령의 대가야식 묘제와 토기양식이 낙동강 서안일대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데, 이를 두고 대가야의 주축이 된 가야연맹의 결성 혹은 대가야 세력의 확산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45호분은 고령지역에서 최대형급에 속하는 것으로 대가야의 전성기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고, 32∼35호분 등의 중형분의 확대발전형으로 중형분의 연대보다 약간 늦은 시기인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 전대에 있었던 순장풍습이 더욱 성해져 45호분과 같은 경우는 12명 이상의 순장자를 희생시킬 정도의 정치력, 경제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6세기 초가 되면 공주지역의 백제와 신라 사이에 군사적 각축전이 낙동강 상류에서 치열하게 벌어지는데, 그 당시의 백제의 영향 하에 고령의 대가야에는 횡혈식 석실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소개되어 일부 채용된다. 그러나 6세기 후반(562년)에는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그 지배층의 분묘인 수혈식 석실분이나 횡혈식 석실분 등의 대형분의 축조는 소멸된다.

참고문헌

『고령지산동고분군』(계명대학교박물관, 1981)
『대가야고분발굴조사보고서』(고령군, 1979)
『대가야 고분 발굴 조사 보고서』(경북대학교 박물관, 1978)
「대가야고분의 편년 검토」(김두철, 『한국고고학보』제45집, 2001)
「대가야 묘제의 편년연구 ·고려 지산동 고분을 중심으로·」(김종철, 『한국학논집』9집,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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