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기요람』에는 1711년(숙종 37)에 성을 쌓은 뒤 관리 책임자로 병사나 수사를 지낸 자를 행궁소위장(行宮所衛將)으로 임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별장(都別將)이라 하였다가 1721년(경종 1) 관성장으로 개명되었다. 『 속대전』에는 북한관성장(北漢管城將) 정3품 1원(員)으로 기재되어 있다. 품계와 정원은 소속 군영이 변동되어도 바뀌지 않았다.
『대전통편』은 1747년(영조 23) 경리청을 없애고 관성장 이하를 총융청에 소속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1782년(정조 6)에 남한산성 유영별장(留營別將)의 예에 의거하여 자급(資級)의 고하를 막론하고 자벽(自辟)하게 하되 맡은 환향(還餉)을 다 거두지 못하였으면 1주년이 되기 전에는 벼슬자리를 옮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도록 하였다.
1792년(정조 16) 총융청의 오영(五營) 제도를 개정하면서 별아병천총(別牙兵千摠)으로 개칭하였다. 『육전조례』에서는 관성장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되, 변어(邊禦) 이상을 지낸 자를 제수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고종 때 품계, 정원, 임무 등에는 변동이 없으나 군영제도의 개편으로 소속이 바뀌었다. 1879년(고종 16) 무위소(武衛所)로 이관되면서 조지서(造紙署) 제조(提調)가 겸직하게 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19년(1882) 6월 19일(계유)에 총융청 소속으로 거론된 것으로 보아 총유청으로 환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84년(고종 21) 친군영제(親軍營制)가 성립되면서 또다시 이관되었다. 1891년(고종 28) 경리청이 부활되면서 되돌아왔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면서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산성을 방어하고 관리하는 수성(守城)과 비축 군량인 향적(餉糴)의 관리 책임을 맡았다. 향적은 묵은 곡식을 당해에 새로 난 곡식으로 바꾸는 데서 나온 표현이다. ‘관성’은 성을 관할한다는 의미를 지녀서 평양의 자모산성이나 수원 화성 등에도 관성장을 두었다. 이는 정식 관직이라기보다 겸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