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승렬은 일제강점기 광주학생운동 및 여운형·안창호의 검거 사건 등을 변론한 법조인이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2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26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법과를 수석 졸업하였다. 일본인변호사회와의 통합을 끝까지 반대했으며,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무료로 변론했다. 1920∼1930년대 독립운동·사상문제에 관한 변호를 자임하였으며, 여운형(1929년), 안창호(1932년) 등의 변호를 맡았다. 광복 이후 과도정부의 사법부 법제처장,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법무부 차관과 검찰총장, 법무부장관과 한국법학원 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경상북도 안동 출생. 1926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법과를 졸업하고 1946년 광복 직후까지 국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08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일어부(日語部)에 입학해 1911년 졸업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 판임관견습시험(判任官見習試驗)에 합격하고, 1916년 황해도 연백군청에서 판임관견습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920년 관리생활을 그만두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했다. 1925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했다.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학교로 돌아가 1926년 주오대학 법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귀국하여 1926년 서울, 1928년 황해도 해주, 1930년 서울을 주요 근거지로 하여 1946년까지 변호사로 활동했다. 개업 직후 일제시기의 3대 변호사로 불린 김병로(金炳魯)·허헌(許憲)·이인(李仁)과 함께 일본인변호사회와의 통합을 끝까지 반대했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 사건에 대해서는 무료로 변론했다. ‘조선공산당사건’으로 검거된 조선공산당원의 담임변호사로 변론을 맡았는데, 공판과정에서 사법권 침해, 고문경찰관 고소, 재판장 기피 문제 등으로 연일 재판소당국과 설전을 벌였다. 또한 피고인들의 건강문제 및 자유로운 공판을 위한 보석문제를 끈질기게 요구하여 재판소당국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후일 ‘간도공산당사건’의 핵심인물들에 대해서도 무료변론에 나섰다.
1927년 신간회 본부 및 경성지회 간부로 활동하고, 광주학생운동 구속학생의 변론을 담당했다. 1928년 1월『조선일보』에 조선총독부의 한국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지적했다가 구속된 조선일보사 주필 안재홍과 편집인 백관수에 대해 김병로·허헌·이인 등과 함께 변론을 맡았고, 1929년 6월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된 여운형, 1932년 상해에서 체포된 안창호의 변론을 맡았다.
이외에도 ‘해주고보 비밀결사사건’, ‘동방무정부주의자동맹사건’, ‘조선일보지국장 폭행사건’ 등 1920∼1930년대 독립운동·사상문제에 관한 변호를 자임했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한민당 발기인, 사법요원양성소 부소장, 과도정부의 사법부 법제처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사법부차장을 맡았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초대 법무부 차관과 검찰총장을 지냈다. 검찰총장의 자격으로 반민족행위특별검찰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9∼1950년과 1960년 두 차례 법무부장관을 역임했다. 1957∼1960년 한국법학원의 원장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