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를 졸업하여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변호사가 되었다. 귀국 후 사회운동가로서 주로 민간 독립운동단체와 연관을 맺었다. 사상적으로 좌익의 경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파와 교분이 깊어 중도좌파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식인 조직체와 문필활동 뿐 아니라 노동자 · 빈민층을 위한 변호활동 등 노동자들의 단체행위에 의한 부당해고문제나 임금투쟁에 대한 문제, 그리고 그 밖의 사회문제로 인한 재판에 변호사로 활동하여 신망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신간회에 좌파를 대표로 참여하여 1927년 2월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나, 그가 소속된 좌익의 종파주의적 성격과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분해, 해소되었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거쳐,1945년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여 부위원장이 되어, 여운형과 손잡고 진보적 정권을 수립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와는 직접 연계하지 않았다.
여운형과 깊은 연대감을 가지고, 이른바 건국준비활동에 나섰지만,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수 차례 테러를 당하고,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언하면서 이에 대한 미군정청의 부인, 한민당 등 우파세력들의 공격 등으로 난항을 겪었다.
1946년 2월 조선공산당과 그 밖의 중요한 좌익단체들이 참여하여 조직된 이른바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수석의장이 되었으며,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이 되었다.
그의 월북일자는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8년 8월 남로당의 대표로 제1기 북한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일했음을 미루어볼 때, 대체로 1947년경에 입북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북한에서 박헌영계로 활동하기보다는 오히려 김일성(金日成)의 권력 장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1948년 8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의장, 10월 김일성대학 총장을 거쳐 1949년 6월부터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6 · 25전쟁 중인 1951년 8월에 병사하였다. 북한에서 여성정치가로서 활약한 허정숙(許貞淑)이 그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