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성(金剛城)」은 조선 초에 기악곡으로 전하던 작자 미상의 고려시대 속악곡으로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곡 이름과 유래가 전한다. 이 악곡의 창작 시기는 개경의 외성인 나성(羅城) 축성이 완성되던 1029년(현종 20) 무렵으로 추정된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성종(聖宗)[재위 982~1020]이 개경을 침범하여 태묘와 궁궐, 민가를 전부 불태우고 28일 만에 압록강을 건너 퇴거하자 개경으로 돌아온 현종(顯宗)은 일찍이 즉위년인 1009년부터 논의되어 왔던 나성의 축성을 지속하여 21년 만에 마침내 공사를 완성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금강성」의 창작 시기를 1270년(원종 11) 무렵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이 설은 믿기 어렵다.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1232년(고종 19)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지금의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39년 만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을 때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당시 개경 환도 이후 곧바로 원 간섭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곡 이름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조로 접어들어 1402년(태종 2)에 예조와 의례상제조가 함께 의논하여 올린 악곡들 가운데 ‘「금강성조(金剛城調)」’가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금강성」은 가사는 상실한 채 조선 초기까지 기악곡으로 전하고 있었다. 당시 임금이 종친 형제(宗親兄弟)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國王宴宗親兄弟]에서 꽃을 올릴 때[獻花] 「금강성」 가락[金剛城調]에 맞추어 ‘행위(行葦)’의 시를 노래 부르도록 하였다.
또한, 여러 신하들에게 베푸는 연회[國王宴羣臣]에서는 꽃을 올릴 때 「금강성」 가락에 맞추어 ‘녹명(鹿鳴)’의 시를 노래 부르도록 하였으며, 1품 이하 사대부를 위한 공사연[一品以下大夫士公私宴]에서는 첫째 잔(盞)과 조(俎)를 올릴 때에도 역시 「금강성」 가락에 맞추어 ‘녹명’의 시를 노래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에 「금강성」이라는 곡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이 곡은 태종대 이후로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