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조선 초까지 기악곡으로 전하던 작자 미상의 고려시대 속악곡.
내용
「금강성」의 창작 시기를 1270년(원종 11) 무렵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 이 설은 믿기 어렵다. 고려 때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1232년(고종 19) 6월에 수도를 강도(江都)[지금의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가 39년 만에 다시 개경으로 환도하였을 때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나, 당시 개경 환도 이후 곧바로 원 간섭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곡 이름과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조로 접어들어 1402년(태종 2)에 예조와 의례상제조가 함께 의논하여 올린 악곡들 가운데 ‘「금강성조(金剛城調)」’가 포함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금강성」은 가사는 상실한 채 조선 초기까지 기악곡으로 전하고 있었다. 당시 임금이 종친 형제(宗親兄弟)들을 위하여 베푸는 잔치[國王宴宗親兄弟]에서 꽃을 올릴 때[獻花] 「금강성」 가락[金剛城調]에 맞추어 ‘행위(行葦)’의 시를 노래 부르도록 하였다.
또한, 여러 신하들에게 베푸는 연회[國王宴羣臣]에서는 꽃을 올릴 때 「금강성」 가락에 맞추어 ‘녹명(鹿鳴)’의 시를 노래 부르도록 하였으며, 1품 이하 사대부를 위한 공사연[一品以下大夫士公私宴]에서는 첫째 잔(盞)과 조(俎)를 올릴 때에도 역시 「금강성」 가락에 맞추어 ‘녹명’의 시를 노래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에 「금강성」이라는 곡 이름이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이 곡은 태종대 이후로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태종실록(太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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