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체신(金體信)의 가계에 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다만, 김체신의 관등이 급찬, 아찬이었고, 집사부의 차관인 시랑(侍郞)을 지낸 것으로 보아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9서당, 10정과 같은 주요 군단의 장관이 아니라 신설 군진인 패강진의 두상대감(頭上大監)으로 임명된 것도 진골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김체신은 763년(경덕왕 22)에 급찬으로서 일본에 파견되었다. 접대를 나온 일본 측 관료와 교섭한 것으로 보아 김체신이 정사(正使)로서 사신단을 이끌었다고 보인다. 경덕왕이 753년에 일본 사절의 접견을 거부한 이래 신라와 일본의 외교관계는 냉각기에 있었다. 이때의 교섭도 일본 측이 신라 사신단을 고위급으로 구성할 것을 요구하고 김체신은 이에 대해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끝났다.
771년( 혜공왕 7)에 검교부사(檢校副使) 집사부 시랑으로서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는 데 참여하였다. 부사는 사원성전(寺院成典)의 차관직으로 상당(上堂)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때 김체신은 감은사성전에 속하였으며, 관등은 아찬이었다. 783년(선덕왕 4)에는 대곡진(大谷鎭), 즉 패강진(浿江鎭)의 우두머리인 두상대감(軍主라고도 불림)이 되었다. 이로써 신라의 최북방 군진인 패강진이 제도적으로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