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임진왜란 때 대방진(大芳鎭)이 있었다 하여 대방진굴항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이를 막기 위하여 현재의 굴항 부근에 구라량영(仇羅粱營)을 설치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러 세종 때 구라량이 고성의 사도(蛇島)로 옮겨감에 따라 폐영(廢營) 되어 소규모의 선진(船鎭)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 말경 순조 때 진주목 관하의 남해 창선도의 적량첨사(赤梁僉使)와의 군사연락과 왜구 방비를 위해 대방선진(大芳船鎭)을 설치하였다. 선진에는 병선의 정박지로 사용하기 위하여 둑을 쌓아 활처럼 굽은 만(彎)을 만들고 굴항(掘項)을 설치하였다. 굴항의 축조공사에는 진주관아 73개의 면민이 동원되어 1820년경에 완공하였으며, 굴항 북편에는 수군장이 거처하는 동헌과 많은 관사들이 있어 수군촌(水軍村)을 이루었고, 잡곡을 포함한 환향미(還鄕米) 2만여 섬을 저장한 선진창(船鎭倉)도 있었다.
현재는 새로이 복원된 모습이고 주민들이 선착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대방진굴항의 서쪽으로는 대방과 남해 창선을 연결하는 연륙교인 창선 · 삼천포대교(三千浦大橋)가 지난다. 이 연육교는 2006년 건설교통부가 주관하고 한국도로교통협회에서 주최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한려해상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