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사제 ()

동명사제
동명사제
고대사
문헌
역사학자, 김재소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사적을 시로 읊고 주석을 달아 1892년에 간행한 시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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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역사학자, 김재소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사적을 시로 읊고 주석을 달아 1892년에 간행한 시문집.
개설

1책 35장. 목판본. 한치유(韓致愈)가 교정하고 홍재조(洪在朝)가 편증(編證)하였다. 서문은 민병석(閔丙奭), 발문은 황립(黃岦)이 썼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고종 28년 7월, 상원(祥原) 문관이며 헌납(獻納)을 지낸 박종선(朴鍾善)이 소청(疏請)하여 왕명으로 동명왕의 능을 개봉(改封)하였을 때, 이 일을 감독한 김재소가 『삼국사기』의 동명성왕본기와 『고씨가승』 중에서 동명왕에 대한 사실들을 살펴 칠언율시의 영사체(詠史體)로 엮은 것이다.

서지적 사항

책은 모두 31장의 시로 되어 있는데 그 아래에 『삼국사기』와 『고씨가승』의 기사를 주(註)로 달아 그 뜻을 명확히 하고, 각 시장의 말미에는 지명이나 연대 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간단히 덧붙였다.

또한, 동명왕의 45대손이라며 『고씨가승』 편성에 관여했다는 고려사람 고기(高基)의 발론(跋論)과 「산론유서(山論遺書)」의 내용을 덧붙여 동명왕릉이 허장(虛葬)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인용된 『고씨가승』에 대해서 자세히 알 길은 없으나, 이 책에 따르면 1049년(문종 3) 고구려 왕족의 후손인 연주(延州) 군수 고기가 『삼국사』와 『고씨가승』을 궤에 넣고서 12주갑(周甲) 후 24대손이 을유년에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연 1825년, 즉 을유년에 24대손 고명강(高明疆)이 『가승』을 보게 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때 고기는 풍수설과 관련된 「산론유서」를 지은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1825년 고명강에게 전해지고 다시 67년 후 김재소가 이 책을 보고 「동명사제」를 편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삼국사』는 고려 초기에 편찬된 소위 『구삼국사』를 의미하는 듯하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의 내용과 『가승』의 내용을 비교해 볼 때 『구삼국사』를 참조한 내용이 보이지 않으므로 기사의 진실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서문을 쓴 민병석은 당시 평안도관찰사로서 중화(中和)에 세워진 고구려 동명왕릉비의 글씨를 썼으며 이 책 맨 앞장에 시를 써 넣었다. 또한 고구려 동명왕 기적비(紀績碑)를 쓴 이기홍(李基鴻), 그리고 이 책의 찬자인 김재소 등도 모두 1892년 중화 고구려 동명왕릉비 건립과 왕릉 개봉의 역사(役事)에 주도적이었던 인물들이다.

내용

이 책의 내용은 고구려 동명왕의 영험한 공업(功業)과 안민(安民)의 공을 찬미한 것이다. 제1장은 금와(金蛙)의 탄생을 적고 있으며, 부여는 지금의 영변이라는 자신의 위치 비정을 첨가하였다.

제2장은 해모수와 유화의 결합과 동명이 하늘의 기운을 받았음을 적고 있으며, 우발수(優渤水)를 지금의 영변강으로 추정하였다. 제3장은 동명성왕의 신이한 탄생과 신비로운 행동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제4∼10장은 주몽의 특출한 재능과 이를 시기한 다른 왕자의 모살을 피해 도망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국가의 기업을 개창하여 졸본천(卒本川)에 고구려를 건국하게 됨을 기술하고 있다.

제11∼22장은 동명왕의 치적을 찬양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그 중 제11장은 송양(松壤)을 항복시켜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섬을 보여주고 있다.

제12장의 주에서는 『가승』의 기사에 따라 『삼국사기』에 나오는 동명왕 4년의 운무(雲霧)와 축성(築城) 기사를 동명왕 2년의 사실로 보았다. 또한 제14장의 주에서도 『가승』의 북쪽 12국을 친 기사를 적고 『삼국사기』의 기사로 보충하였다.

제23∼31장까지는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봉릉(封陵)의 사실과 동명왕의 장지(葬地)를 설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동명왕편(東明王篇)』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1919)
「중화고구려동명왕능기적비(中和高句麗東明王陵紀績碑)」
「중화고구려동명왕능비(中和高句麗東明王陵碑)」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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