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1월 하와이에 이민하기 시작한 한인들은 1903년부터 1908년까지 각 지방의 농장 단위로 10명 이상의 한인이 거주하는 곳에 동회를 설립하고, 동장과 사찰을 선임하여 공공질서와 친목을 유지하였다.
총 12개 동회와 동장은 와이나이 박기장, 나와이 승용환, 와이아루아 이종열, 하나마누 이원식, 하칼라우 최성찬, 호노카아 강순종, 코나 남부 강승진, 코나 북부 최성원, 코나 본동 이대진, 카파아 김경순, 하나 박용택, 파야 장영환 등이다.
각 동회에서는 직선제로 나이가 많고 품행이 단정하며 지식이 있는 사람을 동장으로 선출하였다. 동장은 농장 측으로부터 상당한 권한을 위임받아 동회 회원들의 투표로 규칙을 의결하고, 분규의 재결(裁決), 규칙과 규율 시행, 범칙에 대한 처벌 등을 관장하였다.
동회 회원 간의 폭력, 도박, 간통 등의 분쟁이 발생하면 동장은 벌금 혹은 캠프에서 축출하는 처벌을 시행하였다. 또한, 동회에서는 다른 민족과의 갈등이 발생하거나 차별 대우를 받을 경우 집단적으로 대응하기도 하였다. 자녀 교육, 환자 돌봄, 축제 행사, 귀국 등을 서로 도우며 회원들의 이민 생활을 지원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 하와이와 미주 한인사회는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항일단체 설립을 본격화하였다. 또한, 1907년 7월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정미조약(丁未條約) 체결 등 고국의 소식이 하와이로 전해지면서 7월 17일과 18일 마우이 가히기아 농장과 하와이 파하월로 농장에서는 대동단결(大同團結), 일화배척(日貨排斥), 무예장려(武藝獎勵)와 항일운동을 주장하면서 동회를 변경하여 국민단합회(國民團合會)와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였다.
7월 20일에는 하와히 힐로 지방 거류 한인들이 실지회(實志會)를, 7월 22일에는 국민동맹회(國民同盟會)를 설립하였다. 또한, 8월 5일에는 마우이 하마쿠아포코 농장에서 부흥회(復興會)를 결성하였다. 코자, 하칼라우, 호노카아, 파야 등 7개 지방의 동회에서도 항일운동과 일화배척을 결의하여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처럼 여러 한인 단체가 난립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자 하와이 지역 단체를 통합하는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07년 9월 초, 12개 동회를 포함한 24개 단체 대표자 30명이 호놀룰루에 모여 합동 발기대회를 개최하고 하와이 한인의 통일 단체인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가 창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