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선조 24) 역과에 입격하였다. 그 이전에 이미 1590년(선조 24) 경인년 통신사행의 일원으로 참가한 것이 1607년(선조 40)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준비 단계에서 알려졌으나, 김성일의 『해사록(海槎錄)』에는 사행원 명단이 없어서 어떤 직임을 맡았는지는 알 수 없다.
1592년 11월 이후 전란 당사자 조선을 배제하고 명군과 일본군 간에 강화(講和) 회담이 진행되면서, 박대근과 같은 역관들은 명 장수에게 배정된 접반사에 배속되어 회담의 동태를 탐지하거나 체찰사가 파견되었을 때 수행하여 명군이나 일본군의 진영까지도 들어가서 적정을 파악하여 왔다. 그는 이러한 공로로 서부 참봉에 특제되었다.
1596년(선조 29) 적중에 파견된 정사 황신(黃愼), 부사 박홍장(朴弘長) 등의 통신사행에 참여하였다. 이 사행의 역관은 한학 4명, 왜학 4명이었다. 박대근은 한학 이유(李愉)와 함께 국서를 배행하여 도성에서 경주로 가서 부사 박홍장에게 인계하였다.
쓰시마가 계속해서 사자를 보내 국교 재개를 요청해 오자, 1604년에 조선 정부는 사명당(四溟堂)을 탐적사(探賊使)로 차정하고 군관으로 전계신(全繼信)과 조헌(趙暄)을, 역관으로 박대근과 이언서(李彦瑞)를 배정하여 일본에 보냈다. 사명당 일행은 1605년 3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교토에서 만나고 귀국하였다. 1606년 8월에도 박대근은 역관 이언서와 함께 군관 전계신을 수행하여 대마도(對馬島)에 파견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교 재개 의도를 탐문하여 돌아왔다.
1607년(선조 40)에 박대근은 김효순과 함께 회답 겸 쇄환사행의 당상역관으로 지명되어 일본에 파견되었다. 회답사의 파견으로 양국 간의 국교가 재개되었고, 1609년(광해군 1) 기유약조의 체결로 일본과의 무역이 다시 열릴 때까지 박대근은 쓰시마의 겐소〔玄蘇〕, 야나가와 가케나오〔柳川景直〕 등에게 일본 사자(使者)의 상경 불허 방침을 통보하고, 일본 서계(書契)를 받아들이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는 기유약조 체결 시점에 쓰시마 사자들로부터 일본 사정에 정통한 역관으로 지목되었으며, 1617년과 1624년 두 차례 회답 겸 쇄환사의 당상역관(堂上譯官)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품계는 광해군 초반에 가선대부에 올랐는데, 당초 그가 왜학 역관으로서 관운이 트인 것은 장인 경응순의 후광과 아버지 박연수의 행적이 작용해서이다. 박연수가 사헌부 아전으로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 측과 사이가 좋아서 서울에 있는 대가(大家)까지도 일시 편안하였으며, 끝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행적이 아들 박대근의 관운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짐작된다.
1622년(광해군 14) 선위사 이민구(李敏求)를 수행하여 쓰시마 사자 겐포〔玄方〕를 응대하였다. 그는 일본 사자를 응대할 때 말을 예리하게 하여 상대방의 거짓말을 꺾어서 놀라게 하여, 승복하게 하였다는 평을 받았다. 1627년(인조 5)까지 현직으로 근무하였고, 그해에 죽었다.
박대근 이후 무안박씨 가계는 역관, 의관 등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박대근이 1591년(선조 24)에 왜학 역관에 입격한 이후로 박원랑(朴元郞; 1645년), 박재흥(朴再興; 1663년), 박재창(朴再昌; 1675년), 박춘서(朴春瑞; 1714년), 박도순(朴道洵; 1741년), 박양성(朴養性; 1844년) 등으로 이어졌다.
국교 재개 교섭기에 쓰시마의 겐소〔玄蘇〕 야나가와 도모나가〔柳川智永〕(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의 아들)에게서 일본 화가 가이호우 유쇼〔海北友松〕의 묵죽도를 받고 다시 묘필을 보고 싶다는 뜻의 답장을 1608년(선조 41) 중춘에 인편으로 전달하였다. 그는 자신의 관직을 "조선국 첨지중추부사"라 쓰고 이름 아래에 인장도 찍었다. 이 필적은 일본 개인에게 소장되어 있다.
광해군 말년에 선위사로 파견된 이민구(李敏求, 1589~1670)가 자신의 수행 역관을 지낸 박대근의 일대기를 저술하였으나, 현존 『동주집』에는 박대근 묘표가 빠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