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충(張禮忠)은 조선시대에 선조 대 후반부터 인조 대 후반까지 활동한 한학 역관이다. 역관으로 근무하다가 1609년(광해군 1)에 역과에 입격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명나라의 파병 요구를 완화하는 데에 명날 사정을 잘 아는 역관으로 중용되었다. 인조 연간에는 규정에 구애되지 않고 중요한 임무가 주어져서 1637년(인조 15), 정축화약 이후 접반사의 차비역관으로 왕의 어전통사로 또는 청나라 사행의 역관이나 특정한 건을 해명하기 위해 재자행으로 파견되었다. 공로가 많아서 1633년(인조 11)에 숭록 품계에 이르렀다.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경원(敬源)이다. 1578년(선조 11)에 역과 첨정 장한(張翰)과 한양 김씨 김응순(金應詢)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장억령(張億齡), 증조할아버지는 장풍(張灃), 장인은 춘천 김씨 김황(金滉)이다. 아버지 장한의 사돈은 설성 박씨 박신영(朴信英)이고, 그 가계는 아들 박인상(朴仁祥)-손자 박이절(朴而嶻)-증손 박정신(朴廷藎)-현손 박동윤(朴東尹)-5세손 박태환(朴泰煥)으로 5대에 걸쳐 역과 세전을 이루었다.
장예충의 처가는 춘천 김씨이고, 이 가계는 장인 김황(金滉)의 손자 김홍립(金弘立)이 역과에 입격하고 증손 김성화(金聲和), 현손 김시박(金時璞)으로 3대째 이어졌고 5세손 김준기(金俊起)는 음양과에 입격한 중인 가계였다.
아버지의 전공인 역과에 입격하기 이전 1599년(선조 32)부터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1598년 명나라의 찬획주사(贊劃主事) 정응태(鄭應泰)가 조선을 참소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접반사 차비역관으로 명나라 사자를 통역한 역관들에게 불똥이 튀어, 장예충은 국문까지 받았으나 잘못이 경미하여 무사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32세의 나이로 역과 한학에 입격하였다. 광해군 연간에 주청 · 변무사의 역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는 일이 많았는데, 특히 1618년(광해군 10)에 거부하기 어려운 명나라의 파병 요구를 완화하는 데 명나라의 사정을 아는 경험 있는 역관으로 중용되었다.
인조 대에는 명 · 후금(청) 사자가 나왔을 때 접반사의 차비역관으로 나가서 통역을 담당하였고 다시 어전통사로서 국왕의 의사를 사자에게 중개하였다. 후금 또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의 역관으로도 파견되었고, 청나라에 해명할 긴급한 사안이 있을 때는 재자행으로 종종 파견되었다. 1633년(인조 11)에 전후 역관으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품계가 이미 숭록대부에 이르렀다.
1638년(인조 16) 2월에 의주부사 황일호(黃一皓)가 청나라 사신이 맡겨 기르게 한 말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서 말이 다치게 되자 하인들이 말의 살을 베어낸 일이 있었는데, 이를 해명하기 위해 역관 지추 장예충을 보내 청나라 호부에 자보(咨報)하게 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심양으로 보내기 위해 군량미를 싣고 가던 충청도 배 6척이 평안도 영유(永柔) 앞바다에서 풍랑에 난파된 일을 설명하기 위해 박로의 사행에 장예충을 딸려 보내게 하였다.
1641년(인조 19)부터 동지사가 세폐를 상납하러 갈 때 경험 많은 역관으로, 해마다 장예충을 대동하도록 한 규정이 만들어졌다. 그는 1646년(인조 24)까지 역관으로 근무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에 명나라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못한 조선은 가도(椵島)의 모문룡 후원을 끊을 수 없었다.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세폐 요구를 누그러뜨리고 본국 사정을 변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규정에 구애 받지 않고 역관으로 차정되었다. 장예춘은 수십 년간 명 · 청의 관원을 응대하고 상대국의 사정이나 관례를 알고 사신의 표정이나 심정을 읽어 주선할 수 있다는 기대를 입었다. 때로 계교가 다하여 더 이상 쟁변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