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철은 일제강점기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때 사귄 김영랑과 교류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문예잡지 『시문학』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 4권, 1934년에는 『문학』 3권을 간행했다. 문단 활동으로는 시문학 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희곡을 번역했다. 박용철은 1930년대 문예지를 간행과 방대한 시 번역을 통해 해외 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본관은 충주(忠州). 아호는 용아(龍兒). 전라남도 광산 출신. 아버지 박하준(朴夏駿)과 어머니 고광고씨(高光高氏, 혹은 長澤高氏)의 4남매 중 장남이다.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다가 바로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1920년 배재학당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 귀향하였다.
그 뒤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몇 달 만에 자퇴하였다. 16세 때 울산(蔚山) 김씨 김회숙(金會淑)과 혼인하였다가 1929년 이혼하고, 1931년 5월 누이동생 박봉자(朴鳳子)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친구였던 임정희(林貞姬)와 재혼하였다.
재학 중 수리과목에 재능을 보였는데,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에 사귄 김영랑(金永郎)과 교우로 관계하면서 비롯되었다. 문단 활동 이외의 경력은 전혀 없다. 1930년대에는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詩文學)』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文藝月刊)』 4권, 1934년에는 『문학(文學)』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가 주재하였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鄭芝溶)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문단 활동으로는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다. 정지용 등과 시집과 문예지를 간행하는 등 문학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고 1938년 서울에서 후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 「싸늘한 이마」 · 「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뒤로 『문예월간』 · 『문학』 및 기타의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뒤에 전집에 수록된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간다”로 시작되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다 인생을 비유한 작품이다. 즉, 인정과 고향을 되돌아보는 현실과 ‘삶’의 행정(行程) 속에서 아무런 마련도 없이 또 다른 정박지를 향하여 떠나가는 이상과의 내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1938년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에 발표된 「시적 변용에 대해서」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서 그의 시작이론(詩作理論)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이나 김영랑의 시를 못 따르지만, 『시문학』 · 『문예월간』 · 『문학』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譯詩篇) 등을 통하여 해외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큰 공적이 되고 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사조에 편향되어 혼류를 이루었던 1920년대 문단을 크게 전환시켜 ‘살’과 ‘피’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보다 높은 차원의 시창작, 즉 ‘민족언어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유해는 고향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우산리에 안장되었고, 광주공원에 영랑의 시비와 함께 그의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시비에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의 한 절이 새겨져 있다.
유작집으로 『박용철전집』 2권이 각각 1939 · 1940년 동광당서점에서 간행되었고, 대표적 평론으로 「효과주의비평론강(效果主義批評論綱)」(1931) · 「문예시평(文藝時評)」(193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