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철 ()

박용철
박용철
현대문학
인물
일제강점기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을 저술한 시인.
이칭
용아(龍兒)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고종 41)
사망 연도
1938년
본관
충주(忠州)
출생지
전라남도 광산
내용 요약

박용철은 일제강점기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을 저술한 시인이다. 아오야마학원 중학부 때 사귄 김영랑과 교류하면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문예잡지 『시문학』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 4권, 1934년에는 『문학』 3권을 간행했다. 문단 활동으로는 시문학 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희곡을 번역했다. 박용철은 1930년대 문예지를 간행과 방대한 시 번역을 통해 해외 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충주(忠州). 아호는 용아(龍兒). 전라남도 광산 출신. 아버지 박하준(朴夏駿)과 어머니 고광고씨(高光高氏, 혹은 長澤高氏)의 4남매 중 장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다가 바로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1920년 배재학당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 귀향하였다.

그 뒤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몇 달 만에 자퇴하였다. 16세 때 울산(蔚山) 김씨 김회숙(金會淑)과 혼인하였다가 1929년 이혼하고, 1931년 5월 누이동생 박봉자(朴鳳子)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친구였던 임정희(林貞姬)와 재혼하였다.

재학 중 수리과목에 재능을 보였는데,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에 사귄 김영랑(金永郎)과 교우로 관계하면서 비롯되었다. 문단 활동 이외의 경력은 전혀 없다. 1930년대에는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詩文學)』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文藝月刊)』 4권, 1934년에는 『문학(文學)』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가 주재하였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鄭芝溶)『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문단 활동으로는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다. 정지용 등과 시집과 문예지를 간행하는 등 문학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고 1938년 서울에서 후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 ·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 「싸늘한 이마」 · 「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뒤로 『문예월간』 · 『문학』 및 기타의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뒤에 전집에 수록된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간다”로 시작되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다 인생을 비유한 작품이다. 즉, 인정과 고향을 되돌아보는 현실과 ‘삶’의 행정(行程) 속에서 아무런 마련도 없이 또 다른 정박지를 향하여 떠나가는 이상과의 내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1938년 『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에 발표된 「시적 변용에 대해서」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서 그의 시작이론(詩作理論)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이나 김영랑의 시를 못 따르지만, 『시문학』 · 『문예월간』 · 『문학』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譯詩篇) 등을 통하여 해외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큰 공적이 되고 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사조에 편향되어 혼류를 이루었던 1920년대 문단을 크게 전환시켜 ‘살’과 ‘피’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보다 높은 차원의 시창작, 즉 ‘민족언어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유해는 고향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우산리에 안장되었고, 광주공원에 영랑의 시비와 함께 그의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시비에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의 한 절이 새겨져 있다.

유작집으로 『박용철전집』 2권이 각각 1939 · 1940년 동광당서점에서 간행되었고, 대표적 평론으로 「효과주의비평론강(效果主義批評論綱)」(1931) · 「문예시평(文藝時評)」(1931)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 국민서관, 1973)
『한국현대시인연구』-기타(정태용, 어문각, 1976)
『한국현대시인연구』(김학동, 민음사, 1977)
『한국작가전기연구』(이어령, 동화출판공사, 1980)
「박용철의 인간성과 예술」(김광섭, 『조광』, 1940.8.)
「박용철과 나」(김영랑, 『자유문학』, 1958.6.)
「용아박용철연구」(김윤식, 『학술원논문집』 9,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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