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순희(方順熙, 1904~1979)는 함경남도 원산군 출신으로, 본관은 온양(溫陽), 어릴 때의 이름은 방순이(方順伊)이다.
1911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후 기독교계 학교인 삼일여학교를 다녔다. 1918년 서울에 있는 정신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신한촌의 백산소학교에서 교사로 일하였다. 1925년에 다시 경성에 와서 잠시 러시아영사관에서 통역으로 일하였으며, 사회주의 단체인 북풍회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 후반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함경남도 의원에 선출되어 광복이 될 때까지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결의에 따라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 등 연합국으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한 대표로 선임되어 충칭에 있는 소련대사관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벌였다.
1940년에는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창립하고 집행위원장 겸 서무부 주임을 맡았다.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 제5구 중 제1구에 소속되어 활동하였고, 1941년에 한국독립당 제1차 전당대표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토교 선출 대표로 출석하여 활약하였다. 1942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충칭구 당부의 간사로 선임되었다. 1943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생계부의 생활위원에 선임되었다.
1943년에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부주석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 선전과 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중국 국민당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의 협조로 결성된 대적선전위원회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 상황을 일본 군대 내 한국인 사병에게 우리나라 말로 방송하였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선전연락원으로 임명되어 중국 각지에서 선무공작(宣撫工作)을 펼쳤다. 1946년 4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에서 부인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