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한문필사본. 변산 월명암(月明庵) 소장본이 현재로서는 유일본이다. 월명암의 초창자인 부설거사(浮雪居士) 일가의 성도담(成道譚)을 승전형식(僧傳形式)으로 소설화한 것이다.
신라 진덕여왕 즉위 초 왕도(王都) 남내에 진광세(陳光世)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영리하고 비범하였다. 다섯 살에 불국사 원정선사(圓淨禪師)의 제자가 되어 일곱 살에 이미 법문에 깊이 통달하였다. 법명을 부설, 자를 의상(宜祥)이라 하였다.
구도생활에 전념한 끝에 능가(楞迦 : 지금의 변산) 법왕봉 아래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영조(靈照)·영희(靈熙) 등과 함께 수도에 힘썼다. 그런 뒤 세 사람은 문수도량인 오대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 도중 두릉(杜陵)의 구무원(仇無怨)의 집에서 잠시 머물며 법문을 가르쳤다. 주인에게 묘화(妙花)라는 딸이 있었는데, 부설의 설법을 듣고는 죽기를 한하고 그와 평생을 같이 하려 하였다.
출가한 몸인 부설로서는 애욕에 미혹될 처지는 아니었으나, 자비 보살의 정신으로 묘화와 혼인하고 머물러 살게 되었다. 두 벗은 부설을 남겨두고 오대산으로 떠났다. 세속에 머물러 수도하는 15년 동안 부설은 등운(登雲)·월명(月明) 남매를 두었다. 두 자녀를 부인에게 맡기고 자기를 병부(病夫)라 일컫고는 수도에 전념하여 5년 만에 크게 깨쳤다.
옛 벗 영조·영희가 오랜 수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부설을 찾아왔다. 세 사람은 서로 공부의 성숙도를 알아보기 위하여 물병 세 개를 달아놓고 각자 하나씩 쳤다. 두 벗의 병은 깨어지면서 물이 흘러내렸으나 부설의 병은 깨졌지만 물은 그대로 공중에 달려 있었다. 속세에 머물러 수도한 부설의 깨달음이 출가수도한 두 벗을 앞질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부설은 선악(仙樂)이 울리는 가운데 입적하였다. 두 자녀도 수도하여 열반하였고, 아내 묘화는 110세를 누렸다. 산문의 석덕(碩德 : 덕이 높은 중)들은 두 자녀의 이름으로 암자를 지었고, 지금까지 등운암과 월명암으로 불려온다.
이 「부설전」 외에 부설에 관한 설화도 전승되고 있다. 일련의 부설설화가 문자로 정착되면서 승전형식의 「부설전」으로 정리되는 한편, 구비로도 전승되어 온 것이다. 「부설전」은 단순한 재가성도담(在家成道譚)이 아니라 대승적 보살사상의 구현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본격적인 불교소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