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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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제도
조선시대에, 국가가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할 때 동원하였던 승려.
이칭
이칭
수원승도(隨院僧徒)
제도/법령·제도
제정 시기
조선 초기
공포 시기
조선 초기
시행 시기
조선시대
폐지 시기
19세기 말
시행처
국가
소장처
없음
주관 부서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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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부역승(赴役僧)은 조선시대에 국가가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할 때 동원하였던 승려이다. 고려시대에는 ‘수원승도’라는 명칭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부역승’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부역승들은 조선 전기에는 궁궐 및 국가 사찰 공사에 동원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승병으로서 산성을 축성하고 수비하는 등의 일에 동원되었다.

정의
조선시대에, 국가가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할 때 동원하였던 승려.
개설

불교가 전래된 이래 승려들은 수행자로 존중받았으나 사찰의 조영(造營)뿐 아니라 국가의 토목 공사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공사에 동원되었던 승려들이 고려시대에는 수원승도(隨院僧徒)라는 명칭으로 『고려사』에 등장하며, 조선시대에는 부역승이라는 명칭으로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조선 전기

조선이 건국된 이후 권력자들은 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정치 권력을 박탈하고 수행하지 않는 승려들을 환속(還俗)시키는 방안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1469년(예종 1)에는 『금강경』 · 『반야심경』의 암송으로만 이루어졌던 승과(僧科)의 시험 과목에 『법화경(法華經)』을 추가하였다. 또한 출가를 위해 포(布) 30필만 바치면 되었던 정전(丁錢)을 포 50필로 올려 승려 자격증이라 할 수 있는 도첩(度牒)을 발급받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정전을 낼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도첩이 없는 상태에서 승려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강화된 도첩제로 인해 도첩을 발급받지 못한 무도첩승(無度牒僧)이 날로 증가하자 나라에서는 국가 공사에 이들을 동원하여 일정 기간 일을 시킨 뒤 도첩 또는 승인 호패(僧人號牌)를 발급해주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여 나라에서 부역승을 최초로 동원한 것은 1436년(세종 18) 흥천사(興天寺) 중수(重修) 공사 때이다. 유생들의 반대를 묵살한 세종은 동원에 자원한 부역승 600명에게 식량을 제공하였으며, 30일의 부역 기간을 만료하는 대로 도첩을 주었다. 1457년(세조 3) 8월부터 시작된 유점사(楡岾寺)회암사(檜巖寺) 중수 공사 때에는 6만 3,678명의 부역승이 동원되었다. 또한 1483년(성종 14)에 시작된 창경궁 공사 때에는 2,000명의 무도첩승에게 부역을 시켰다. 공사가 완료되기 2개월 전인 1484년(성종 15) 2월에는 이미 부역 기간을 만료한 승려 4,000명에게 도첩을 주어 유생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1526년(중종 21) 7월에 완공된 한강 상류의 견항방색공사(犬項防塞工事)에서도 동원되었던 3,000명의 부역승들에게 승인 호패가 지급되었다. 당시 2개월 이상 부역에 참여한 자들에게 도첩을 발급하였는데, 이때부터 2개월 이상의 부역 기간을 채운 승려에게 도첩을 발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2개월 동안의 부역으로 도첩을 쉽게 얻을 수 있었으므로 많은 승려들이 앞다투어 부역에 참여하였다. 1537년(중종 32) 2월에 착공하여 7월에 완공한 안행량운하(安行梁運河) 공사에서는 4월에 이미 2개월의 기한을 채운 5,000명의 부역승들에게 도첩을 주기도 하였다. 그 뒤 유신들로부터 승인호패 회수론이 일어날 때마다 중종은 곤란함을 피력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유신들과 절충하여 1539년(중종 34)에는 도첩이 없는 모든 승려들을 환속시키기로 하였으며, 도첩을 가진 승려라 할지라도 국가에서 시행하는 토목 공사에 의무적으로 종사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승려들에게는 군역의 의무가 없었고 국가의 토목 공사가 있을 경우에만 동원되었다.

조선 후기

임진왜란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전란으로 국토가 황폐해지고, 빈번한 자연재해로 인해 기근과 전염병이 발발하였다. 이때 권력자들은 국역(國役) 자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승려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승려들은 이미 임진왜란에서 의승병으로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산성을 축조하고 수비하는 일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궁궐을 수리할 때 황해도 · 충청도 · 경기도 · 평안도 등에서 승군 180명을 동원하였다. 광해군 시절 경덕궁인경궁을 조영(造營)할 때에는 각각 1천여 명의 승려들을 동원하였다. 인조 대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한 후 평양성을 쌓는 일에 강원도와 황해도의 승려 200명과 충청도의 승려 200명을 동원하였다. 또한 1624년(인조 2) 3월부터 1626년(인조 4) 7월까지 한양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을 쌓는 과정에서 각 도에서 승군을 징발하였다. 효종 대에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기 위해 경기도에서 50명, 강원도에서 100명, 충청도에서 200명, 전라도에서 500명, 경상도에서 350명의 승려를 동원하였다가 다시 800명을 추가로 배정하여 총 2천 명의 승려를 공사에 동원하였다. 1677년(숙종 3) 동래부 왜관의 신축 공사에서도 경상도 각 읍의 승려와 전라도의 승려들을 동원하였다. 또한 지방관이 주관하는 제방 수축 공사에도 승려들을 징발했는데, 1777년(정조 1) 안동 제방을 수축하는 일에도 승려들이 동원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왕조실록』

단행본

김갑주, 『조선시대 사원경제사 연구』(지양사, 1989)

논문

김순남, 「16세기 조선의 피역승의 증가와 승도 조직의 재건」(『조선시대사학보』 66, 2013)
김용태, 「조선후기 남한산성의 조영과 승군의 활용」(『한국사상과 문화』 78, 2015)
이광린, 「이조후반기의 사찰제지업」(『역사학보』 17, 1962)

인터넷 자료

기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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