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정변』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조상이 같으며, 충청도 연산에 살았던 18세기 인물인 후촌(後村) 김경유(金景游)가 편찬한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주석서이다. 『주자가례』를 경(經)으로 인식하여 이를 오래도록 적용될 규범으로 지키고자 했던 경향을 보여 주는 책이다.
편찬자 김경유(金景游)에 대한 기록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몇 가지 부분을 통해 정리한다. 『사례정변』 서문에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종당(宗黨)이고 그 마을에서 태어났다.”라고 하였으므로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연산(連山,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연산리)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1897년에 쓴 김지수(金志洙)의 『사례정변』 발문에서 호를 후촌(後村)이라 하였다. “100여 년 남짓 원고가 상자 속에 갈무리되었다.”라고 한 점으로 보면, 그는 18세기에 생존했고 18세기 중후반에 이 책의 원고를 작성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상례비요(喪禮備要)』와 『가례집람(家禮輯覽)』을 대표로 삼는 김장생의 예학(禮學) 성과를 두루 섭렵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사례정변』에서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였고, 권상하보다 후대 인물로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의 설이 극소수 보인다는 점에서 그의 학문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김경유에 대한 생애 자료가 부족하여 이 책의 완성 시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된다. 송치규의 서문에 따르면, 주자가 고금의 예를 절충 손익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편찬했지만 중간에 분실되었고, 이후 송‧명의 선비와 조선의 유학자들이 『주자가례』를 탐독하면서 주해나 논설로 그 의미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저마다의 견해를 세웠기 때문에 배우는 이가 어렵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모르게 되자 김경유가 『사례정변』을 편찬하여 길흉(吉凶), 상변(喪變)을 당했을 때 제대로 처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었다고 하였다. 김경유의 원고를 그의 손자 김형로(金衡魯)가 간행하기 위해 1836년에 송치규에게 서문을 받았는데, 그 규모는 10책이었다. 이것이 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1897년에 일족인 김지수가 쓴 발문을 실어 간행한 것이 현재 전하는 목활자본 14권 7책이다. 김지수에게 발문을 의뢰한 사람은 김경유의 후손 김태현이고, 김영수(金盈洙)가 교정을 도와 10책에서 3책 분량을 줄여 7책으로 정리하였다. 김경유의 원고 중에는 도설(圖說)도 있었지만 불에 탔다고 하였다.
『사례정변』은 『주자가례』의 본문과 관련 경전(經傳) 내용 및 앞선 유학자들의 설을 정례(正禮)와 변례(變禮)로 구분하였다. 전체 구성은 서문, 범례, 목록, 본문 14권, 발문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주자가례』를 경(經)으로 삼아 편성하였기에 『주자가례』 본문은 한 글자도 바꾸지 않았다. 즉, 『주자가례』의 편집 순서와 내용을 철저하게 준수하면서 경전과 유학자의 예설 중에서 『주자가례』의 뜻을 해석한 것이 있으면 간략하게 분주(分註)하고, 절문(節文)과 도수(度數)에 추가해야 할 부분이 있으면 본문 아래에 넣었으며, 하나의 예(禮)에 대해서 학자 간 의견이 다를 경우에는 종류별로 구분하여 권점(圈點) 아래에 기록함으로써 살펴보기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중국 유학자의 설에는 공권(空圈, ◯)을, 우리나라 유학자의 설에는 흑권(黑圈, ●)을 써서 구분하는 특색을 보였다. 본래의 뜻과 이후에 붙은 뜻은 높게 쓰거나 낮게 쓰는 방식으로 구분하였다. 『주자가례』에는 없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사항은 따로 제목을 만들어 각 조목 아래에 덧붙이는 방식을 택하였다.
권1은 가례서(家禮序) 및 통례(通禮)의 사당(祠堂), 권2는 통례의 심의제도(深衣制度), 권3은 통례의 거가잡의(居家雜儀)로 되어 있다. 권4는 관례(冠禮), 권5는 혼례(婚禮), 권6부터 권12까지는 상례(喪禮), 권13과 권14는 제례(祭禮)이다. 권14 말미에 학궁례(學宮禮)를 덧붙인 것이 특별한데, 『주자가례』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빠뜨려서는 안 될 것으로 보아 추가한 것이다. 학례(學禮)와 향례(鄕禮) 등까지 가례서 속에 포함하여 논의하던 예학 흐름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학궁례’를 덧붙였기 때문에 책의 이름을 ‘가례정변’이라고 하지 않고 ‘사례정변’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인용 서목은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예설 중에서는 김장생과 송시열의 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데 특히 『상례비요』를 철저하게 존중하였으며, 수암 권상하의 설도 제법 보인다. 한편 영남 학자의 예설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설을 상당수 인용한 것 외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한강(寒岡) 정구(鄭逑),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설이 극히 일부 보일 뿐이다. 김경유 자신의 설은 따로 세우지 않았다.
『사례정변』은 『주자가례』의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경전과 유학자들의 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데 치중한 주석서이다. 이를 위해 김경유는 우리나라의 예설 중에서 사계 김장생과 『가례집람』‧『상례비요』의 설, 우암 송시열과 수암 권상하의 설을 대폭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예학 학통을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이는 김경유보다 한 세대 뒤인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의 『가례증해(家禮增解)』로 연결되었다. 두 예법에 관한 책은 『주자가례』 본문을 한 글자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보여 준다. 18세기에 『주자가례』를 만세통행지규(萬世通行之規)로 규정하여 절대 권위를 부여했던 조선시대 예학의 큰 흐름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