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종이 바탕에 수묵. 제발(題跋)이나 낙관이 없어서 화가와 제작 연대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서궐은 경희궁의 속칭(俗稱)으로, 이에 견주어 창덕궁 · 창경궁은 동궐(東闕), 경복궁은 북궐(北闕)이라 불렀다. 그림은 경희궁의 건축과 주변의 자연 경관을 한눈에 실감 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부감법(俯瞰法)으로 그린 것이다. 12폭의 종이를 이어 붙인 화폭 위에 먹만을 사용해서 백묘(白描)로 표현한 범본(範本)이다.
자연 경관은 실제의 지세(地勢)에 바탕을 두고 그려졌음이 발굴 조사 과정에서 밝혀졌다. 경관의 주요 구성 요소인 산과 나무의 표현법은 이의양(李義養)의 화풍과 통한다.
건물은 궁궐의 핵심 부분인 정전(崇政殿), 편전(興政堂), 침전(隆福殿 · 會祥殿) 등이 화면 중앙에 오도록 구도를 잡았는데, 전체 궁궐의 모습이 효율적으로 보이도록 부감하여 평행사선투시도로 그렸다. 이는 궁궐의 좌향이 남향이고 정문이 동쪽 담장 끝에 동향으로 세워져 있으며 궁궐 전체가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 조건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된 수법이다. 아울러 19세기에 제작된 「동궐도(東闕圖)」나 「경기감영도(京畿監營圖)」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표현법이다. 앞뒤의 깊이감은 45도 기울인 투시선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건물이 제왕의 거처답게 남향을 하고 있어서 건물의 정면(남면)과 우측면(동면)만 볼 수 있도록 그려져 있다.
건물마다 지붕 용마루선 바로 아래에 건물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이는 「동궐도」에서 용마루 위쪽 여백에다 이름을 적은 것과 대조를 보인다. 이와 함께 그림의 완성 단계에서 채색을 할 경우 지붕의 기와골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서궐도안은 초본이 아닌 범본일 가능성이 있다.
이름이 기록된 건물은 모두 99군데에 이르는데, 이들 건물의 연혁을 기초로 하여 그림의 제작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즉 정조가 세자 시절인 1774년(영조 50)에 쓴 「정묘어제경희궁지(正廟御製慶熙宮誌)」에 기록되어 있는 건물과 대조하고, 또 『궁궐지(宮闕志)』(헌종 연간)에 기록되어 있는 건물과 비교하면 1774년∼순조대(1800∼1834년) 사이에 그려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화풍상 이의양과 통한다는 점을 고려하고 『서궐영건도감의궤』(1831년 4월)에 수록된 건물과 「서궐도안」의 건물이 차이를 보이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서궐도안」의 제작 시기는 1829년에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 순조대의 어느 때일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