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이천(利川). 아버지는 태보 내사령(太保內史令) 서희(徐熙)이다.
996년(성종 15)에 갑과에 급제하였다.
1016년(현종 7) 중승(中丞)이 되고, 이듬해 형부시랑(刑部侍郎)이 되어 송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018년 상서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尙書吏部侍郎兼左諫議大夫)를 거쳐 국자좨주 지이부사(國子祭酒知吏部事)를 지냈다.
딸이 왕비가 되자 1022년 중추사 우산기상시(中樞使右散騎常侍)에 오르고, 내사시랑 판서경유수사(內史侍郎判西京留守事)를 역임하였다.
1030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이부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判尙書吏部事), 덕종 초 검교태사(檢校太師)가 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으며 정종(靖宗) 때 판도병마사(判都兵馬使)가 되었다.
1041년(정종 7)에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받고 중대광(重大匡)이 되었다.
이듬해 두 번 임금에게 글을 올려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기를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병이 들어 지장사(地藏寺)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임금이 우승선(右丞宣) 김정준(金廷俊)을 보내어 어의(御衣) 2습(襲), 곡(穀) 1,000석, 말 2필을 절에 들이어 복을 빌었다.
병이 위독해지자 임금의 문병을 받고, 삼중대광 내사령(三重大匡內史令)에 임명됨과 함께 자손에게 영업전(永業田)이 하사되었다. 정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원숙(元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