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굿 무가」는 동해안별신굿인 「심청굿」에서 불리는 서사무가이다. 널리 알려진 고소설 「심청전(沈淸傳)」과 유사한 내용으로 지금까지 여러 차례 반복 조사되었고, 활자화되어 발표된 것으로만 15편에 달한다. 지금도 동해안별신굿이 지속적으로 연행되고 있으므로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심청굿 무가」는 고소설 「심청전」, 판소리 「심청가(沈淸歌)」와의 관련 속에 다양한 연구가 수행되었다. 「심청굿」에서 판소리 「심청가」가 유래했다는 주장, 판소리에서 「심청굿」이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본 분석을 통해 보면 딱지본 소설인 「교정 심청전」을 바탕으로 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1960년대에 동해안 무녀 이금옥이 본격적으로 불러 확산되었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심청굿 무가」의 내용을 보면 고소설 「심청전」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전반부에 비해 후반부가 간략하다. 즉 심청이 매신하여 인당수에 투신하기까지는 비교적 상세한 설명과 다양한 삽화(揷話)가 존재하지만, 심청이 인당수에 투신한 후에 어머니를 만나는 과정에서 용궁에 대한 설명과 삽화가 비교적 간략하다. 또한 심청이 황제를 만나 황후가 되는 장면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다. 「심청가」와 「심청전」에서는 심청과 황제의 상봉 장면에 다양한 삽화가 들어가 있고, 심청이 황후가 된 후에도 심 봉사의 안위를 걱정하고 이를 황제가 위로하는 내용이 있지만 「심청굿 무가」에는 발견되지 않는다. 심청이가 황제에게 봉사 잔치를 열어 달라고 말하는 것으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뺑덕 어미의 심술에 대한 묘사가 간략하며, 뺑덕 어미가 임신하였다며 심 봉사를 놀리는 장면도 간략하다. 목동 삽화와 방앗간 삽화도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심청이 심 봉사를 만난 후의 후일담에서도 역시 간략하다. 즉, 전체적으로 볼 때 「심청굿 무가」는 심청이 매신하고 인당수에 뛰어든 다음에는 판소리나 고소설에 비해 이야기가 상당히 간략하게 전개되는 면모를 보인다.
「심청굿 무가」 형성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하나의 요인으로 우리나라 해안 지방에 널리 퍼져 있는 인신 희생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재난을 방지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이 해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상당히 널리 알려진 설화 유형인데, 동해안 지역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 처녀가 제물로 바쳐진다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은 유형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거타지 설화」나 울릉도 「태하성황당 유래담」이 대표적이다. 또한 동해안 지역 거리굿에서 연행되는 「봉사거리」도 주목할 만하다. 「봉사거리」에 등장하는 「방아 타령」 화소(話素)는 「심청전」이나 「심청가」에서 현재 발견되는 삽화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있다. 특히 봉사가 눈을 뜬다는 내용은 「심청전」과 유사하기 때문에 「심청굿 무가」가 연행되는 과정에 굿판에 참가한 청중들로부터 거부감 없이 수용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동해안 무속인들의 예인적(藝人的)인 기질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무가 연행에서 창의성을 다양하게 보여 준다. 무속인들은 늘 새로운 굿거리에 대한 열망이 있었을 것이며, 이로 인해 '심청굿'이라는 새로운 거리가 창안되어 연행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 아니라 「교정 심청전」이 널리 읽히면서 굿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교정 심청전」과 「심청굿 무가」에 나타난 삽입가요가 모두 동일하다는 점에서 영향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요인들을 바탕으로 「심청굿 무가」가 형성되어 현재는 동해안별신굿의 가장 인기 있는 굿거리가 되었고 지금도 왕성하게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