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자유적은 1937년 10월 간도성(間道省) 민중교육관주사(民衆敎育館主事)로 있던 다케시타 테루히코[竹下暉彦]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일본 관동군은 암석이 풍부한 소영자 일대에서 채석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 중에 유물이 출토되자 다케시타가 『만주사학(滿洲史學)』에 관련 글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를 보고 받은 당시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였던 후지타[藤田亮策]가 1938년 7월 2일부터 7월 18일까지 이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일부는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물의 소장 경위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종합해 보면, 발굴을 주도한 후지타가 유적의 조사보고서 또는 논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일부 중요한 유물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왔고, 우리나라가 해방되자 그 유물이 그대로 경성제국대학에 남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영자유적은 연길시의 동북쪽에 위치하는데, 남쪽에는 부르하통하, 북쪽에는 성자산 산맥이 길게 이어지는 산자락 아래의 하안 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유적 동쪽으로 약 2㎞ 떨어진 곳에는 성자산산성이 있다.
1938년 조사 당시 유적은 A, B, C지구로 나누었는데, 발굴조사는 주로 A지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A지구의 경우 동서 25m, 남북 8m의 좁은 공간에서만 52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B지구와 C지구는 이미 파괴가 심하게 이루어진 곳으로 유물을 수습하는 수준이었다. 후지타는 B지구를 유적의 중심지로 파악하였는데, 당시 200∼300기의 무덤이 이미 파괴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소영자 유적의 범위인 동서 100m, 남북 50m의 범위 내에 수 백기의 돌널무덤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군은 30∼40°의 계단식 경사면을 따라 동서방향으로 조밀하게 축조되었다. 무덤은 먼저 0.8∼1.5m 깊이의 토광을 파고, 석회암 판석을 깐 뒤 다시 작은 판석을 앞뒤와 좌우에 세워 긴네모모양[長方形]의 돌널[石棺]을 만든 다음 판석 또는 괴석을 덮는 방식으로 무덤을 축조하였다. 돌널의 길이는 1.5∼1.7m, 너비는 40∼60㎝, 높이는 약 30㎝이다. 매장 방식은 단인장(單人葬)에 바로펴묻기[仰身直肢葬]와 펴묻기[伸展葬, 直葬]가 일반적이나 다인장(多人葬), 굽혀묻기[屈葬]도 확인된다. 유물은 파괴된 무덤에서 수습한 것이 대부분이다. 보고서에는 무덤별 출토 상황이 기록되어 있으나 개개 유물이 정확하게 어디서 출토되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출토된 유물로는 붉은간토기[紅陶] 등의 토기와 간돌검, 돌화살촉, 돌창, 돌도끼 등의 마제석기 및 타제석기, 각종 뼈연모[骨角器] 등이며 100여 기에 이르는 사람뼈도 함께 출토되었다. 소영자유적의 연대는 두만강 유역 청동기 중기의 가장 이른 단계로 여겨진다.
소영자유적은 한국 동북부 지역 또는 간도 지역을 대표하는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고고학 조사는 대부분 역사시대 고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소영자유적은 당시 조사된 선사시대 무덤군 가운데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거의 유일한 유적으로 비록 보고서의 내용은 소략하지만 학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