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전은 고려·조선시대에 만들어 쓴 철전·동전 및 석전 등의 주화에 대한 통칭이다. 엽전의 모양은 둥글고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으며, 명목가치에 따라 무게와 크기가 다르다. 동일한 명목가치의 엽전도 주조 시기·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다. 고려 성종대에 만든 철전이 최초의 엽전이다. 이후 주로 동전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구리에 주석과 납을 혼합하여 주조했다. 사회·경제적 미숙, 화폐 원료공급과 유통정책의 불합리성으로 활성화하지 못하다가, 임진왜란 후 생산력의 증진과 더불어 상품·교환경제가 발전하면서 상평통보가 법화로 채택되고 주조와 유통도 활성화하였다.
고려시대의 엽전으로는 철전(鐵錢)과 동전(동국통보 · 동국중보 · 해동통보 · 해동중보 · 삼한통보 · 삼한중보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동전(조선통보 · 상평통보, 상평통보에는 당일전 · 당백전 · 당오전 등이 있다)과 석전(十錢通寶)이 있다.
엽전의 모양은 둥글고 가운데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으며, 명목가치(名目價値)에 따라 무게와 크기가 다르며, 동일한 명목가치의 엽전도 주조 시기 · 기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화폐사(貨幣史)에서 볼 때,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화폐를 만들어 쓰고자 한 것은 996년(성종 15) 철전을 주조 유통한 사실로 소급된다. 이때 만들어 쓰고자 했던 철전이 바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엽전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목종과 숙종 연간에 동국통보(東國通寶) · 동국중보(東國重寶) · 해동통보(海東通寶) · 해동중보(海東重寶) · 삼한통보(三韓通寶) · 삼한중보(三韓重寶) 등 여러 종류의 동전, 즉 엽전을 주조 유통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종 때 조선통보라는 엽전을 중앙과 각 지방에서 주조해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화폐정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 철전이나 여러 가지 종류의 동전 등 엽전을 법화로 유통 보급시키기 위한 노력은, 그 당시의 사회 · 경제적 미숙, 화폐원료 공급과 화폐유통 정책의 불합리성 등이 직 · 간접적 원인이 되어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0세기 말부터 16세기 말, 곧 임진왜란 이전에 이르는 6세기 동안에는 왕조의 교차는 있었다 할지라도 엽전과 같은 명목화폐 수용력의 증진이라는 점에서 볼 때, 사회 · 경제의 본질적 변화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해 봉건 조선왕조의 성리학 중심의 가치체계와 농업 중심의 생산양식은 급속도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해체 과정 속에서 농업 · 광업 · 수공업 등의 사회생산력은 증진되었고, 동시에 상품 · 교환경제 발전은 촉진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초부터 엽전과 같은 명목화폐의 통용을 필요로 하는 사회 · 경제적 요청에 부응하는 한편, 전란으로 파탄에 직면한 국가재정을 보완하기 위해 동전이나 석전 등 엽전을 법화로 주조, 유통시키고자 하였다.
화폐유통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동전을 주조해야만 하였다. 정책 추진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선 조선 전기에 주조해 보관해오던 동전(조선통보)을 유통 보급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국가가 화폐유통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량의 화폐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동전을 주조해 유통 · 보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17세기 초부터 1750년대 말에 이르는 시기에 별도로 주전청(鑄錢廳)을 설치하고 동전을 주조하거나, 중앙 관청 및 군영(軍營)은 물론 수원 · 개성 · 안동 등 각 지방 관청으로 하여금 화폐를 주조, 발행하게 하였다. 한편, 화폐주조사업에 소요되는 경비부담을 줄이기 위해 민간인에게 화폐주조를 허락하거나 싼값으로 중국 동전을 수입해 오기도 하였다.
조선정부는 17세기 전반기에, 그 시기에 주조된 ‘팔분서 조선통보(八分書朝鮮通寶)’와 십전통보(十錢通寶 : 錫錢), 그리고 조선 전기에 주조되었던 조선통보 및 중국 동전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엽전을 유통 보급시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화폐유통 정책으로, 1740년대에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한 개성을 중심으로 강화 · 교동 · 풍단 · 연백 등 인근 지방에서 동전이 원활히 통용되었다. 1750년대에는 중국과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국제교역이 발달한 의주 · 안주 · 평양 등지에서도 동전이 유통되고 있었다.
조선은 1678년(숙종 4)에 상평통보, 즉 엽전을 다시 주조, 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상평통보를 법화(法貨)로 채택, 주조 유통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화폐경제의 확대보급 추세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화폐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나 저해 요인이 없지는 않았다. 특히 전통적 사회질서의 해체를 수반하는 화폐유통에 대한 봉건사회의 보수적 반동이나, 화폐공급 부족현상으로서의 전황(錢荒)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요인들이 명목화폐의 통용을 필요로 하는 당시 사회의 근대를 향한 자체지향, 다시 말해서 봉건사회를 벗어나서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역사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었다. 따라서 16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물품화폐와 칭량은화(稱量銀貨)의 유통이 지배적인 봉건 조선사회에 명목화폐인 상평통보가 국가의 유일한 법화로서 유통기반을 이룩하게 되었다.
상평통보가 초기의 유통보급단계를 지나 공 · 사 유통계에서 일반적 가치척도 · 교환수단 · 지불수단 및 가치저장수단 등 제반 화폐기능을 발휘하게 됨에 따라 호조 · 선혜청(宣惠廳) · 균역청(均役廳) 등 중앙의 재정관리관청과 지방관청, 그리고 각 군영의 비축과 수입 · 지출의 화폐화 비율이 높아지고, 소작료 · 노임의 화폐화가 증진되었다. 또한, 상업자본과 고리대자본이 보다 유동성향이 큰 화폐자본으로 전환되는가 하면, 크게는 토지 · 노예 · 가산 · 가축 등에서부터 작게는 시장의 일용잡화에 이르기까지 동전(상평통보 또는 엽전)을 매개로 거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1720년대 이후에는 북쪽으로 회령, 서쪽으로 의주, 남쪽으로 동래와 제주도에서도 동전이 통용되는 등 그것의 유통 범위는 국내 각 지방으로 확대되고, 각 계층의 화폐에 대한 가치인식은 심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730년대부터는 ‘일문전 상평통보(一文錢 常平通寶 : 當一錢)’만을 법화로 사용하는 단순, 소박한 화폐유통체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고, 그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당이 · 당오 · 당십 · 당백 · 당천전 등 각종의 고액전을 주조, 유통하는 문제와 함께 칭량금은화를 동전과 병용하자는 주장이 거듭 제기, 논의되기도 하였다. 또한, 1810년대 말에는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근대 금은본위제를 연상시키는 화폐제도개혁방안이 구상, 제시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1860년대 초에 당백전과 1880년대 초에는 당오전을 주조, 유통하는 동시에, 대동전(大東錢)이라는 은화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다.
정부는 1678년에 상평통보를 법화로 주조, 유통할 것을 결정하고, 호조 · 상평청 · 진휼청(賑恤廳) · 정초청(精抄廳) · 사복시 · 어영청 · 훈련도감 등으로 하여금 그것을 주조하게 하였다. 그 뒤 상평통보는 중앙의 각 관청이나 각 군영 뿐만 아니라 각 지방관청에서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주조, 유통하였다. 그러나 상평통보가 계속 통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장됨에 따라 정부는 화폐주조 관리체계의 획일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즉, 정부는 화권재상(貨權在上)이라는 전통적 정치이념을 구현하고 화폐원료의 수급을 적절히 조절하며, 또한 상평통보의 주조 발행과정을 합리적으로 관리, 통제하기 위해 상평통보의 주조관리체계의 획일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숙종 · 영조 시대를 거쳐 그와 같은 시도는 거듭되어 1785년(정조 9) 마침내 호조에서 상평통보의 주조 · 발행을 전관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 때에 들어서면서 이 획일화 원칙이 무너지기 시작해 중앙의 각 관청 · 지방 관청 및 각 군영에서 상평통보를 주조, 발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화폐주조 관리질서의 문란은 표면적으로 획일화 원칙의 관리체계가 다원화되었다는 점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국고 전담하에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화폐주조사업이 부민(富民) 등에 의한 도급제(都給制)로 전환되는 경향이었다. 즉, 화폐주조사업의 사영화 경향(私營化傾向)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하는 대원군 집권기에 문란해진 화폐주조사업 관리질서는 정비되었고, 민비 집권기에 다시 문란해졌다가 1883년(고종 20)에 화폐주조사업의 집중적 관리를 위해 우리 나라 최초의 상설 조폐기관인 전환국(典圜局)이 설치됨으로써 화폐주조사업 관리체계의 획일화가 실현되기 시작하였다.
상평통보의 원료로는 동(銅) · 석(錫) · 연(鉛)이 사용되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동이 주가 되었다. 동은 주로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했고, 석은 중국에서 수입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이나 석에 비해 그 혼합비율이 적은 연은 대체로 국내에서 채굴, 사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조선정부는 국내의 동광을 개발해 보았지만, 그와 같은 시도는 정부의 전통적인 광업개발 소극화 정책의 견제, 동광 경영의 불합리성 및 채광기술의 미숙성으로 19세기 전반기를 제외하고는 별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따라서 국내의 화폐원료는 거의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태였고, 이와 같은 원료의 공급난은 조선정부의 원활한 화폐경제발전을 저해한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즉, 동을 비롯한 화폐원료의 만성적 공급난은 일반 유통계에서 필요로 하는 충분한 수량의 상평통보를 주조, 발행할 수 없었고, 동시에 품질이 나쁜 화폐를 주조, 유통하게 됨으로써 상평통보의 원활한 유통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화폐원료의 공급난으로 화폐의 품질이 조악해지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상평통보 한 개의 무게는 ‘2전5푼’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동의 공급난 등이 중요한 원인이 되어 2전 · 1전7푼 · 1전2푼으로 점차 줄어들었고,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는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와의 격차가 큰 악화(惡貨)인 당백전 · 당오전 등을 주조, 유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상평통보는 1678년부터 조선정부의 유일한 법화로 계속 주조, 유통되어오다가 1894년에 주조가 중단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엽전, 즉 상평통보가 유통, 보급되고, 이에 따라 화폐경제가 확대 발전되었다. 화폐경제는 봉건 조선사회의 농업중심의 중세적 생산양식과 성리학 중심의 가치체계의 해체를 가져왔고, 근대지향을 촉진한 역사적 요인으로 기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