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군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의 제4대 국왕인 세종의 왕자.
이칭
성명
이전(李瑔)
시호
정렬(貞烈)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34년(세종 16)
사망 연도
1457년(세조 3)
본관
전주(全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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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영풍군은 조선의 4대 국왕인 세종의 왕자이다. 이름은 전(瑔)이다. 세종의 서자 중 여덟 번째 아들로, 혜빈양씨의 3남이다. 단종을 보호하려다 세조 즉위 후 예안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후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여 임실로 귀양을 갔으며,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시도에 연루되어 위리안치 중 죽임을 당하였다.

정의
조선의 제4대 국왕인 세종의 왕자.
가계 및 인적 사항

영풍군(永豐君)의 성명은 이전(李瑔)이며, 조선의 제4대 왕인 세종의 서자 중 여덟 번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세종의 후궁 혜빈양씨(惠嬪楊氏)이다. 1434년(세종 16) 출생하였고, 한남군(漢南君) 이어(李𤥽), 수춘군(壽春君) 이현(李玹) 등이 형이다. 1441년(세종 23) 영풍군의 군호(君號)를 받았다. 형조참판을 지냈고 사육신(死六臣)의 일원인 박팽년(朴彭年)의 딸인 순천박씨와 혼인하였다.

주요 활동

1455년(단종 3) 단종이 선위하자 어머니 혜빈양씨, 세종의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등과 처벌을 받아 예안(禮安)으로 귀양을 갔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으로 가산이 적몰되고 고신(告身)을 회수 당한 후 임실(任實)로 귀양갔다. 1457년(세조 3)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시도가 발각되어 위리안치 되었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자녀로는 1녀가 있다.

영풍군은 금성대군이 혜빈양씨와 그녀의 아들들과 결탁하여 권세를 탐하고 불법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세조 즉위 직후 처벌받았지만, 단종을 양육하였던 어머니와 함께 단종을 보호하려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상훈과 추모

1712년(숙종 38) 신원(伸冤)되어 봉호가 회복되었으며, 이듬해(1713년 숙종 39) 정렬(貞烈)의 시호를 받았다. 1758년(영조 34) 계양군(桂陽君)의 10대손으로 봉사손을 정하였고, 1790년(정조 14) 정조의 명으로 무덤을 수축하도록 하였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정단(正壇)에 추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대자동에 있었는데, 유실되어 정조의 명으로 단이 설치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세조실록(世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홍재전서(弘齋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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