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고려 말 서북면안무사 등을 역임하고 조선 초기 회군공신에 책록되었으나 조선 개국세력에 의해 유배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주요 활동
뒤에 문과에 급제하여 동진사(同進士)가 되고 성균직학(成均直學)·강녕부승(江寧府丞)이 되었다. 1374년(공민왕 23) 대군시학(大君侍學)·주부(注簿)를 역임하였다. 우왕(禑王) 때에 전리총랑(典理摠郎)을 거쳐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옮겼다가 이어 서북면안무사(西北面安撫使)가 되어 유리인(流離人)들을 안집(安集)하였다.
1390년(공양왕 2)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로서 양광·전라·경상도수군도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水軍都體察使) 겸 방어영전염철사(防禦營田鹽鐵使)가 되었고, 예조판서(禮曹判書)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 겸 전라·경상·양광(全羅慶尙楊廣) 삼도수군도체찰사(三道水軍都體察使)가 되어 염철(鹽鐵)·조전(漕轉)·초토(招討)·영전(營田)·선성(繕城: 성곽을 수리하는 일)의 일을 겸하여 삼도(三道)의 군수(軍需)와 세공(稅貢)을 운반하는 데 공이 많았으며, 어염(魚鹽)의 이익으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였다.
태안과 서산의 접경인 탄포(炭浦: 굴포(堀浦))에 운하를 파서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자는 헌의(獻議)를 올려 공사에 착수했으나, 물 밑에 암석이 많고 또 조수의 문제로 인해 결국 실패하였다. 1392년(공양왕 4)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었으나 조선 개국으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와 위화도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추록되었으나, 1394년(태조 3) 다시 공주에 유배되고 뒤에 왕씨(王氏) 일족이 화를 당할 때 함께 살해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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