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는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막료(幕僚)였다. 김성일이 1590년(선조 23)에 정사 황윤길(黃允吉)의 부사로 일본에 사행(使行)한 데서 비롯하여, 1593년 4월 진주에서 진몰(陣沒)되어 고향인 안동에 묻힐 때까지의 일을 담담하고도 예리한 필체로 기술하였다.
김성일은 전쟁 중에도 농사를 권하고 군량을 판출하며, 분쟁을 화해시켜 원한에 대적하게 한다. 백성들은 방문(榜文)으로 타이르고 서장(書狀)으로 책망하며 임금께는 장계(狀啓)로써 아뢰어 군무에 힘을 다하였다. 「용사일기」에는 이와 같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김성일의 애국충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용사일기」의 서문에서 서명서(徐命瑞)는 그가 저자의 출생지인 의령현감으로 있을 때에 후손 이일화(李一華)·이일신(李一藎)의 요청으로 「용사일기」의 초고를 받아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서문을 쓴다고 하였다.
또, 이황(李滉)의 학문적 전통을 이은 학자인 이상정(李象靖)이 발문을 썼다. 저자의 6대 봉사손(奉祀孫) 이후만(李垕晩)이 감히 이 책을 사사로이 못하여 바로 인쇄를 해서 오래도록 전하게 하려고 한다고 하니, 이에 느껴 발(跋)하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뒷날에 본문을 약간 첨삭하고, 책 끝에 「촉석루삼장사시병서(矗石樓三壯士詩幷序)」를 붙여 재간하였다.
초유사 김성일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지만, 당시 의병들의 활동과 관군, 그리고 백성들과의 상관성을 유기적으로 요령있게 기록해 놓았다. 특히, 임진년 4월 왜란이 일어난 뒤부터 약 15개월간의 전쟁상황이 매우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뿐만 아니라 일기문학으로도 백미의 작품이라 할만하다. 1960년에 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에서 초간본을 역주하여 간행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