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전투는 임진왜란 때인 1592년 6월에 이광이 이끄는 조선군이 용인 광교산에서 왜군에게 패한 전투이다. 이 전투의 목적은 왜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4만의 관군을 모아 경상도, 충청도의 관군과 함께 북상했다. 이 군대를 지휘한 이광은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인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 공격은 서울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오던 와키사카의 기습으로 실패하였다. 게다가 이광의 주력부대는 아침을 먹다가 왜군의 기습을 받아 미리 퇴각한 권율 군대를 제외하고 모두 죽었다. 결국 이광은 파직되었고 권율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일본군에게 빼앗긴 서울을 되찾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도내 관군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병마절도사 최원(崔遠)으로 전라도를 지키게 하였다. 자신은 4만의 관군을 이끌고 나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을 중위장(中衛將)으로 삼고 전 부사 이지시를 선봉장에 임명해 용안강(龍安江)을 건너 충청도 임천역(林川驛)으로 진출하였다.
전라도방어사 곽영(郭嶸)은 2만의 관군을 거느리고,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을 중위장으로 삼고 전 부사 백광언(白光彦)을 선봉장으로 삼아 여산(礪山) 대로를 지나 금강을 건넜다. 경상도관찰사 김수(金睟)는 부하 몇백 명을 인솔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尹先覺)도 몇만의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1592년(선조 25) 5월 26일 경기도 진위(振威에 모이니 하삼도의 관군은 ‘호왈십만(號曰十萬)’이라 하여 그 위세가 당당하였다.
6월 3일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수원에 머물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의 관군이 갑자기 밀어닥치는 것을 보고 도망쳐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과 합쳤다. 삼도의 관군은 군세가 우세한 전라도관찰사 이광이 맹주가 되어 전 군을 지휘하였다. 이 때 용인 · 수원 등지에는 일본 장수 와키사카(脇坂安治) 휘하의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와키사카는 해전에서 불리하니 육전에 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수군 1,600명을 거느리고 육상 경비를 맡고 있었다. 그 주력 1,000명은 서울에 주둔하였다. 잔여 600명은 부장(部將)인 와키사카와 와타나베(渡邊七右衛門) 등이 거느리고 용인 부근 북두문산(北斗門山)과 문소산(文小山) 등에 소루(小壘)를 만들어 지키고 있었다.
이광은 곽영과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봉장 이지시와 백광언으로 하여금 일본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조선 관군이 왕성한 것을 보고, 싸우지 않고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 주장 와키사카는 곧 휘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떠나 용인으로 향하였다.
원병이 도착하자 일본군은 공격 채비를 갖췄다. 백광언과 이지시는 무질서하게 선두에 서서 관군을 지휘하여, 갑작스러운 적의 기습을 막아내지 못하고 다른 장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잔여 관군들은 이광의 본군(本軍)에 포함되어 함께 광교산 서쪽으로 진출해 진을 쳤다. 군의 사기는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다.
충청도의 관군은 수원으로 전진해 먼저 이 방면의 일본군을 공격하고 연락선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4일 아침 용인 방면으로 철수했으므로, 군사를 돌려 전라도군과 힘을 합쳐 진지를 구축하였다. 6일 아침 이광은 다음 싸움을 위해 일제히 아침을 먹다가 불시에 일본 기병의 기습을 받고 대군이 일시에 무너졌다. 오직 권율만이 휘하 군을 온전히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그 뒤 7월 8일 이치(梨峙, 배티 또는 배재) 전투에서 대승할 수 있었다.
큰 기대를 걸었던 삼도근왕병(三道勤王兵)이 쉽게 무너지자 서울 수복의 꿈은 깨지고, 조선 전 군민(軍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이 싸움에서 대패한 죄로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전주로 돌아가 곧 파직되었다. 충청도관찰사 윤선각은 공주로,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경상우도로 돌아갔으며, 충청병사 신익(申翌)은 백의종군하였다. 이광의 후임으로 권율이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