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산(月山)의 법호는 성림(聖林)이다. 승려가 되기 전의 성은 최(崔)씨였으며, 본관은 경주이고, 함경남도 신흥군 출생이다. 아버지는 흥규(興圭), 어머니는 노(魯)씨이며, 어려서의 이름은 종열(鍾烈)이었다.
유년기에 고향의 서당 등에서 공부했던 월산은 부친이 사망한 이후 1943년 석왕사(釋王寺) 노승 안광의 소개로 상원사의 금초를 만나게 된다. 그 인연으로 1944년 망월사를 찾아 당시의 고승인 금오(金烏)의 문하에서 출가하였다. 이듬해 수덕사의 만공(滿空)을 찾아가 공양주로 한철을 지내면서 ‘이 뭣고’라는 화두(話頭)를 받았다.
1946년 만공이 입적하자, 남쪽으로 내려가 보길도의 남은사, 문경의 봉암사 등에서 참선 수행을 하였다. 특히 향곡, 성철, 보문, 청담, 자운 등이 ‘부처님 법대로 살자’라고 주장한 '봉암사 결사'에 참가했던 경험은 이후 불교정화운동(佛敎淨化運動)과 종단의 소임을 맡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봉암사 결사가 해체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란을 간 월산은 범어사, 금정사, 선암사 등에서 정진 수행을 이어나갔다.
1954년 8월 '불교정화운동'을 위해 모인 '전국 비구승 대표자 대회'에서 승려의 자격을 심사하는 전형위원으로 뽑히면서 중앙 교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비구승만으로 종단이 구성되자 스승인 금오와 함께 종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이후 법주사, 신흥사, 동화사 등에서 주지를 맡았고, 조계 종단의 재무부장, 감찰원장, 재건 비상종회 의원 등을 역임하면서 1950~60년대 불교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월산은 1968년 금오 선사에게서 전법(傳法)을 인가받았다. 금오는 입적 직전, 제자들에게 오른쪽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이때 월산이 일어나 '홀연히 본래사를 깨달으니 부처와 조사가 어디에 있느뇨. 뱃속에 건곤을 간직하고 몸을 돌려 사자후를 한다. 세우지 않고, 버리지 않고, 쉬지 않는다(忽覺本來事佛祖在何處肚裏藏乾坤轉身獅子吼不立不捨不休)'라고 하자, 금오가 대중들에게 '모든 일을 월산에게 맡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월산은 1968년과 1978년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고, 1974년에는 불국사의 주지를 맡으면서 강원 · 선원 등을 개설하여 수행 도량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종단의 지도자로서 1986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에 취임했으며, 국내 여러 선원의 조실(祖室)로 추대되어 후학을 양성하는 데 매진하였다. 한편 1970년에는 불교 · 천주교 · 성공회 · 원불교 · 유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종교협의회 초대 회장에 취임해 종교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1997년, 20여 년 이상 주석(駐錫)하던 불국선원 염화실에서 세속 나이 86세, 법랍 55세로 입적하였다. 그는 입적 3일 전 제자들의 간청으로 “일생을 돌고 돌았으나 한 걸음도 옮긴 바 없나니, 본래 그 자리는 하늘과 땅보다 먼저이니라(廻廻一生未移一步本來其位 天地以前)”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