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동문선』 및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전한다. 어무적의 출신에 대해서는 주1, 혹은 관노(官奴) 등의 상반된 기록이 있다. 『함종어씨세보(咸從魚氏世譜)』 등의 기록에 의하면, 어무적의 어머니는 관비였고 아버지는 사족(士族)이었다. 어무적은 처음에는 관노였다가 뒤에는 면천된 것으로 추정된다.
칠언고시이나, 삼언 · 오언도 섞여 있다. 삼언 · 오언 · 칠언을 변화 있게 구사한다. 반복과 대구의 표현기교는 민요의 형식과도 상통하는 것이 있다.
「유민탄」에서 어무적은 자기 고장에 머물러 살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유민(流民)의 탄식과 하층민의 원성을 대변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 없음을 탄식하고 참다운 애민정치(愛民政治)의 실현을 갈망하였다.
「유민탄」은 처음에 주2이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한다. 그리고 흉년에 먹을 것이 없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노래한다. 다시 주3라는 말을 두 번 되풀이한다. 그리고 추위에 덮을 것이 없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노래하였다.
동시에 ‘나[我]’는 창생을 구제할 마음은 있다 그러나 그럴 만한 힘이 없다고 탄식한다. 창생을 구할 힘이 있는 ‘저들[彼](벼슬아치들)’은 그럴 마음이 없다 그들은 나라의 지시공문조차 빈 종이인 것처럼 여기고 만다고 개탄하였다.
「유민탄」은 소인(小人: 벼슬아치들)들이 마음을 돌려 군자(君子)의 염려와 귀를 가지고 백성들[小民]의 말을 들어주었으면 한다는 호소를 하였다. “소민의 말은 있으나 인군(人君: 임금)이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금의 창생들은 모두 갈 곳을 잃고 있다.”고 탄식하였다.
「유민탄」의 작자가 하층민인 것은 위항문학(委巷文學)에서는 드문 예이기에 주목된다. 그러나 작자는 시인이라 자처하며 자신을 하층민(蒼生)과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된다. 허균(許筠)은 자신의 시비평집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이 시를 당시의 대표적 걸작이라 평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