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1795년(정조 19) 을묘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전개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
내용
그런데 6개월 뒤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 신부의 입국 사실과 그의 거처가 관가에 알려졌다. 1795년 6월 27일 포졸들이 주 신부의 거처인 최인길(崔仁吉)의 집을 덮쳤으나, 주 신부는 이 사실을 사전에 통고받고는 피신하고 없었다. 포졸들은 최인길을 주 신부로 오인하여 대신 체포하였다. 뒤늦게 주 신부가 아님을 안 관가에서는 주 신부를 중국으로부터 인도해 온 지황(池璜)과 윤유일(尹有一)을 체포하여 그들에게 모진 고문으로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다.
하지만 이들이 끝까지 함구하여 실토하지 않으므로 체포 다음날 타살(打殺)하였다.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이 사실을 알고, 세 사람을 일찍 죽게 해서 주 신부 체포의 기회를 놓쳤다는 상소를 올려 문제를 재연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부사과 박장설(朴長卨) 등이 천주교와 관련해서 이승훈(李承薰) · 이가환(李家煥) · 정약용(丁若鏞)을 성토하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리자 마침내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시켰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각각 좌천시켰다.
이로써 주 신부로 인한 을묘박해는 서울에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도리어 박해가 더욱 심해져 1797년의 정사박해와 1800년의 경신박해를 유발하였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사학징의(邪學懲義)』
-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 『한국천주교회사』(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최석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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