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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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정조 19) 을묘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전개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
이칭
이칭
을묘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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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95년(정조 19) 을묘년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을묘실포사건(乙卯失捕事件)을 계기로 전개된 천주교 박해의 옥사(獄事).
내용

1784년에 창설된 조선천주교회는 성직자 없이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의 자학(自學)을 통하여, 천주신앙에 도달한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목자(牧者) 없는 교회였다. 이들은 신앙생활의 실천과 교회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성직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1790년부터 북경(北京) 주교에게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성직자영입운동을 꾸준히 추진하였다. 그 결과 마침내 1794년 말에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6개월 뒤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주 신부의 입국 사실과 그의 거처가 관가에 알려졌다. 1795년 6월 27일 포졸들이 주 신부의 거처인 최인길(崔仁吉)의 집을 덮쳤으나, 주 신부는 이 사실을 사전에 통고받고는 피신하고 없었다. 포졸들은 최인길을 주 신부로 오인하여 대신 체포하였다. 뒤늦게 주 신부가 아님을 안 관가에서는 주 신부를 중국으로부터 인도해 온 지황(池璜)과 윤유일(尹有一)을 체포하여 그들에게 모진 고문으로 주 신부의 행방을 다그쳤다.

하지만 이들이 끝까지 함구하여 실토하지 않으므로 체포 다음날 타살(打殺)하였다. 2개월 뒤에 대사헌 권유(權裕)가 이 사실을 알고, 세 사람을 일찍 죽게 해서 주 신부 체포의 기회를 놓쳤다는 상소를 올려 문제를 재연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부사과 박장설(朴長卨) 등이 천주교와 관련해서 이승훈(李承薰) · 이가환(李家煥) · 정약용(丁若鏞)을 성토하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리자 마침내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시켰고, 이가환은 충주목사로,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각각 좌천시켰다.

이로써 주 신부로 인한 을묘박해는 서울에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도리어 박해가 더욱 심해져 1797년의 정사박해와 1800년의 경신박해를 유발하였고,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사학징의(邪學懲義)』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한국천주교회사』(달레 원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분도출판사, 1980)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최석우,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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