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은 대한제국기 전라북도관찰사, 전라북도장관 등을 역임한 관료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8년(철종 9)에 태어나 1916년에 사망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2차 봉기 때에 보은에 집결한 북접세력을 공격하였고, 김개남 부대를 격파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가담하였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7년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특사로 사면되었고 전라북도관찰사로 전임되어 의병을 진압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으며 한국병합기념장,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등을 받았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882년(고종 19) 2월 무과에 급제하여 1883년 3월 친군좌영 초관(親軍左營哨官)에 임명되었다. 1884년 12월 수문장, 1886년 1월 훈련원 주부(主簿), 7월 훈련원 판관(判官), 1887년 12월 훈련원 첨정(僉正) 등의 무관직을 거쳤다. 1889년 9월 흥해군수, 흥양감목관(興陽監牧官)으로 임명되었고, 1891년 3월 나주감목관으로 전임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그해 3월 초토영군(剿討營軍)에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7월에 장위영 영관(壯衛營領官), 8월 장위영 부영관(壯衛營副領官)으로 전임되었다. 동학농민군이 2차 봉기하자 10월 죽산부사(竹山府使) 겸 양호도순무영 우선봉(兩湖都巡撫營右先鋒)이 되어 농민군을 진압하였다. 특히, 동학의 북접(北接) 세력이 2차 봉기에 동조하여 보은에 모여들자 이들을 기습 공격하였다. 김개남(金開南)이 이끄는 농민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하여 공주로 북상하던 전봉준(全琫準)의 동학군과 합세하지 못하게 만들었으며, 패퇴하는 동학군을 추격하여 해미 · 유구 · 노성 · 논산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을 살육하고, 전주성에 재집결한 농민군을 물리치고 전주성을 다시 빼앗았다.
또 청일전쟁에서 장위영 참령관으로서 일본 육군 중장 노즈 미치쓰라[野津道貫] 제5사단장을 수행하는 한국병대 제2대대장으로 평양에 주둔한 청나라 군대에 대한 정찰 및 정보를 제공하는 업무를 수행하였고, 아울러 평양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청군의 시체를 처리했다. 1895년 4월 양주목사로 전임되었다가 6월 육군 참령, 7월 훈련대 제1대대 대대장으로 승진했으나 10월 7일 친일성향의 훈련대 해산을 통고받았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가담했다. 사건 당시 동료 훈련대장인 우범선(禹範善)과 함께 병사를 데리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광화문 경비를 담당하며 일본 낭인들을 도왔다. 이 일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아들 이진백(李鎭白)과 함께 부산으로 도주해서 일본인의 집에 숨었다가 그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망명해 10여 년을 생활했다. 당시 유길준과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일본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1907년 8월 귀국해서 9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10월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1908년 1월 의병전쟁이 치열하던 전라북도관찰사 겸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로 전임되어 의병 진압에 앞장섰다.
국권피탈 후인 1910년 10월부터 전라북도장관에 임명되어 1916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1914년부터 1916년 3월까지 도장관으로 전라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고, 제국재향후원회(帝國在鄕後援會) 조선지회 전라북도부회장 등 일본 사회단체의 지부장을 겸임하였다. 1912년 8월 조선총독부에서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에서 유공장,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 1916년 3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이두황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2·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48∼55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