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승지, 동지부사, 황해도감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인조반정 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0년(인조 8)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성균관박사를 거쳐 승정원주서가 되었다. 입시(入侍)해 사초(史草)를 지을 때 글을 거침없이 쓰니, 왕이 매우 기뻐해 말 한 필을 상으로 내려준 일이 있었다.
1636년 황해도도사로 있을 때 청나라의 침입을 맞아 감사를 대신해 산성을 지키고, 적의 포로가 된 주민들이 탈출해오자 이를 보호하였다. 한편 적병 100여 명을 잡았으나 무공을 조정에서 알지 못했다 한다.
효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으로서 김자점(金自點) 일당의 죄를 거론해 김자점을 귀양시켰다. 이듬 해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진주목사로 있을 때 정사를 잘해 다시 소환되어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었다. 그러나 1654년(효종 5) 폐서인(廢庶人)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강씨(姜氏)의 신원(伸寃)을 주장하다 사형된 감사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고 성주에서 은거 생활을 하였다. 이듬 해 다시 안동부사에 기용되고 여러 곳의 부사를 지낸 뒤 참의 · 승지 · 판결사를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66년 황해도감찰사가 되어 그 지방의 학교 시설을 적절히 폐치(廢置), 정리해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 체포되었으나, 당시 상신(相臣)인 이경석(李景奭)이 왕에게 간청해 용서받고, 제조(諸曹)의 참의 · 승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충청도 청풍부(淸風府)에 은거하며, 주민을 위한 구휼사업 · 수리개발로 수도전(水稻田)을 개척해 농민들의 칭송을 받았다. 1673년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면직을 청하고 시폐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저서로는 『삼인사적(三仁事蹟)』이 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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