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때, 대한제국군 육군 참위, 독립의군부 사령관,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의병장 · 관료 · 교육자 · 독립운동가.
이칭
좌현(佐顯)
고광(古狂), 고광자(古狂子)
이칭
세영(世榮), 유흠(維欽), 천민(天民)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9년(고종 6)
사망 연도
1938년
본관
덕수(德水 : 지금의 경기도 개풍)
출생지
충청남도 청양
정의
대한제국기 때, 대한제국군 육군 참위, 독립의군부 사령관,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의병장 · 관료 · 교육자 ·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세영(世榮) · 유흠(維欽) · 천민(天民). 자는 좌현(佐顯), 호는 고광(古狂) · 고광자(古狂子). 충청남도 청양 출신. 아버지는 내금위장 이민하(李敏夏)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양헌수(梁憲洙)에게 한학을 수학한 뒤, 1889년(고종 26)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봉학(李鳳學)과 향리에서 유회(儒會)를 설립, 스스로 주1이 되어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격분하여 홍주에서 이설(李偰) 등과 함께 관찰사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승우(李勝宇)의 간계로 패퇴하여 홍산(鴻山)으로 피신하였는데 김복한(金福漢) 등 많은 동지가 붙잡혔다.

이듬해에 황재현(黃載顯) · 이관(李寬) · 김홍제(金弘濟) 등과 남포에서 재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군주사(軍主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97년 대한제국군의 육군 주2, 1899년 부위(副尉), 1902년 정위(正尉) · 헌병대장서리를 지냈다.

1904년 낙향하였으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 · 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모의하였다. 1906년 의병장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나, 홍주성에서 패하여 붙잡혀 황주로 종신 유배되었다가, 1907년 철도(鐵島)로 이배된 후에 풀려났다. 같은 해 독립의군부 충청 · 전라 · 경상도 등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동생 이창영(李昌永)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 항일활동을 하였다. 1913년 3월 독립의군부 함경 · 평안 · 황해도의 3도사령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6월 만주로 망명, 대종교에 입교하여 주3가 되었다.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소장을 맡았고, 신흥강습소가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인 1917년 11월에는 신흥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신흥강습소|신흥중학교 후신) 교장이 되었다. 또 한교공회(韓僑公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2월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하여 군사부장, 10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이 되어 재만주 독립군의 최고 영도자가 되었다.

1930년 2월 북경에서 조성환(曺成煥) · 손일민(孫逸民) 등과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7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2년 충칭신사회(重慶新社會) 부위원장, 요 · 길 · 흑민중후원회(遼吉黑民衆後援會) 간사로 활약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1(국가보훈처, 1986)
『기려수필』(송상도, 탐구당, 1974)
『독립운동사자료집』1·2(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
『독립운동사』1·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3)
『한국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향약 단체의 우두머리. 우리말샘

주2

대한 제국 때에 둔 위관 계급의 하나. 부위의 아래, 특무정교의 위이다. 우리말샘

주3

대종교 총본사에서 시선(試選)하는 교직. 공이 있는 신도에게 주는 것으로, 교리를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 지교의 위, 정교의 아래이다. 우리말샘

집필자
오세창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