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세영(世榮) · 유흠(維欽) · 천민(天民). 자는 좌현(佐顯), 호는 고광(古狂) · 고광자(古狂子). 충청남도 청양 출신. 아버지는 내금위장 이민하(李敏夏)이다.
양헌수(梁憲洙)에게 한학을 수학한 뒤, 1889년(고종 26)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입학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봉학(李鳳學)과 향리에서 유회(儒會)를 설립, 스스로 약장(約長)이 되어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격분하여 홍주에서 이설(李偰) 등과 함께 관찰사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승우(李勝宇)의 간계로 패퇴하여 홍산(鴻山)으로 피신하였는데 김복한(金福漢) 등 많은 동지가 붙잡혔다.
이듬해에 황재현(黃載顯) · 이관(李寬) · 김홍제(金弘濟) 등과 남포에서 재기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군주사(軍主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97년 대한제국군의 육군 참위(參尉), 1899년 부위(副尉), 1902년 정위(正尉) · 헌병대장서리를 지냈다.
1904년 낙향하였으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 · 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모의하였다. 1906년 의병장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약하다가 홍주성 전투의 패배로 붙잡혀 같은 해 12월 황해도 황주군 철도(鐵島)로 종신 유배되었다. 1907년 11월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莞島)로 이배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사전조칙(赦典詔勅)이 반포되어 풀려나게 되었다.
1908년 동생 이창영(李昌永)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이듬해에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 항일활동을 하였다. 1913년 3월 독립의군부 함경 · 평안 · 황해도의 3도사령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6월 만주로 망명, 대종교에 입교하여 상교(尙敎)가 되었다.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소장을 맡았고, 신흥강습소가 신흥중학교로 이름을 바꾼 뒤인 1917년 11월에는 신흥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월 다시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신흥강습소|신흥중학교 후신) 교장이 되었다. 또 한교공회(韓僑公會)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2월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하여 군사부장, 10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이 되어 재만주 독립군의 최고 영도자가 되었다.
1930년 2월 북경에서 조성환(曺成煥) · 손일민(孫逸民) 등과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7월 강구우(姜九禹) 등과 조선혁명당 제1지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32년 충칭신사회(重慶新社會) 부위원장, 요 · 길 · 흑민중후원회(遼吉黑民衆後援會) 간사로 활약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