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준(張德俊, 1891~1920)은 황해도 재령군 출신으로,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추송(秋松)이다.
어릴 적 한학을 공부한 후 1907년 재령 기독소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에 졸업하였다. 그해 명신학교에 입학해 1911년에 졸업하고, 바로 명신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4년에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하여 조선문 신문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는 대학 진학 예비 과정인 세이소쿠〔正則〕 예비학교에 다녔다. 1917년에는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부간사로 활동하면서 재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조선인 노동자와 고학생들이 친목 도모를 위해 결성한 노동동지회의 회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19년에는 노동동사회의 회장을 맡았다. 3 · 1운동이 일어날 무렵 폐결핵으로 요양 중임에도 홋카이도〔北海道〕에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 실태를 살피기 위해 다녀왔다.
1919년 7월 무렵부터 김성수 등과 함께 민간신문 창간 준비에 나서 창간 발기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20년 4월 『 동아일보』 창간 당시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하였다. 동생인 장덕수는 초대 주간(主幹)을 맡았다. 1920년 4월 2일부터 4월 13일까지 10회에 걸쳐 『동아일보』 1면에 "조선 소요에 대한 일본 여론을 비평함"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썼다. 그해 7월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 의원단 취재를 위해 중국에 특파되었다.
1920년 10월 간도에서는 일본군이 조선 동포를 무차별 학살한 경신참변이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듣고 10월 중순 간도로 건너가 참상의 현장을 취재하였다. 하지만 당시 『동아일보』가 정간(停刊)을 당해 보도기사가 나가지는 못하였다. 그해 11월 8일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는 사이 실종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1930년 4월 『동아일보』는 장덕준을 순직자로 추앙(推仰)하며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1957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장덕준을 종군기자(從軍記者)이자 순직기자로 인정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