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중사(中使)는 ‘중앙에서 급사(給使)하는 사람’ 혹은 ‘중앙에서 파견된 사자(使者)’의 의미로 중국 후한(後漢) 대부터 사용되던 용어이다. 환관(宦官)들이 주로 중사의 임무를 맡았는데, 당시에는 궁녀(宮女)나 황궁(皇宮)의 양마인(養馬人)이 중사로 파견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남북조 시기를 거치면서 환관이 중사로 임명되는 것이 고착화되어, 당(唐)대에는 환관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신라에서는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 「태자사낭공대사비」 등 하대(下代)의 승려 비문에서 궁궐로 초빙하거나 부의(賻儀)를 전달하는 등 국왕과 고승(高僧) 간의 교류를 중개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성사(星使)’, ‘중연(中涓)’, ‘중관(中官)’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흥녕사징효대사보인탑비」에는 ‘중사성(中使省)’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의미와 발음 및 역할 상의 유사성을 볼 때 『 삼국사기』 직관지에 세택(洗宅)의 경덕왕 대 개칭명으로 나오는 중사성(中事省)과 동일한 실체로 판단된다. 중사성이 곧 중사들의 소속 관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종래에는 중사성(세택)이 국왕의 근시 기구로서, 하대에 내조(內朝)를 형성하며 기존의 국왕 직속 행정관부 집사성(執事省)의 실권을 흡수해 갔으며, 고려시대의 핵심 관부 중서성(中書省)으로 계보가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런데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목간에 보이는 세택의 업무를 살펴보면 식해 · 젓갈 등 음식물의 관리나 목욕 관련 용품의 수급 등 궁내의 잡무(雜務)에 해당한다. 이에 당나라의 내시성(內侍省)에 해당하는 관부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흥덕왕 원년조를 통해 신라에서 존재가 확인되는 환관들의 소속 관부가 중사성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단, 신라에서 중사의 역할을 맡았던 이들이 모두 환관들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왕의 근친 자제(子弟)나 문한직(文翰職) 종사자 등이 중사를 겸대(兼帶)한 경우들도 확인된다. 이들의 업무는 고승과의 교류 등 중사의 기본 역할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