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은 정복으로 넓어진 영토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해 '참치〔站赤〕'라고 하는 역제를 운영하였다. 길 또는 역을 의미하는 잠〔yam〕과 ‘잠의 사람’이라는 뜻의 잠치〔yamchi〕가 각각 역참(驛站) 또는 참역(站驛), 그리고 참치로 번역된 것이다.
고려는 초기부터 개경을 중심으로 22개의 역도(驛道), 525개의 역(驛)을 근간으로 하는 역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고려의 역제가 몽골과의 평화적인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몽골의 역참제, 곧 참치와 관련을 맺게 되었다. 고려의 수도 개경과 몽골의 수도인 대도를 잇는 역로망이 원종 대에 마련되었는데, 고려 전역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양국의 수도를 오가는 일종의 간선 교통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와 몽골 사이에 놓인 역참은 크게 주도로와 우회로의 체계로 40여 곳에 달한다. 주도로는 '개경― 서경―의주―동경(현재의 요양)'을 거치는 경로로, 대략 18~23개의 역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우회로는 '개경―함흥―황초령―만포―용양행성 개원로'로 이어지는 경로로, 개경에서 함흥 지역을 거쳐 동계의 끝인 정주까지는 대략 18, 19개의 역이 있었다.
우회로는 카단의 반란 당시에 개원로의 역참이 파괴되자 고려의 역참을 통해 만주 지역이 대도와 소통하였다는 기록을 통해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주도로와 우회로에 위치한 역의 수는 40곳 안팎이 된다. 기본적으로 고려의 영토 안에 마련된 역로는 고려가 관리하였지만, 몽골이 동녕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여 몽골의 영토가 된 지역에 있는 역로망에 대한 부담도 여전히 고려가 지고 있었다.
몽골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는 역참을 관장하는 토드코순의 설치나 수역 설치 등과 같이 고려 역참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일본 원정, 1290년대 중국 강남 지역과 고려, 요동을 잇는 대량의 곡식 운 송과정에서 몽골이 탐라나 압록강 어구 등에 수역(水驛)을 설치하여 수송을 직접 관리하기도 한 것이다.
참치에는 대체로 100~170필 정도의 역마를 구비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증빙물이라 할 패부(牌符), 포마성지(鋪馬聖旨), 포마차자(鋪馬箚子) 등이 있어야 하였다. 고려의 왕은 이러한 증빙물을 사신에게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은 정복지에 대해 속칭 ‘6사’로 불리는 여러 가지의 사항을 화친의 조건으로 내세우는데, 역참의 설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는 초기부터 역제를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6사’ 중 역참의 설치라는 요구 조건에는 신속하게 응할 수 있었다. 1259년에 태자였던 원종을 통해 고려가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면서 역참에 대한 요구가 나왔는데, 실제로 이해 8월에 몽골의 장수 예수테르〔也速達〕가 개경에서 몽골로 돌아가면서 역참 시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263년(원종 4) 4월에 고려가 북쪽 경계에서 ‘치우(置郵)’, 곧 역의 정비가 끝났음을 몽골에 강조하였으니, 1259년에서 1263년 사이에 고려에서 몽골을 잇는 역참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략 40곳으로 역참을 마련하였으나, 1281년(충렬왕 7)에 충렬왕이 몽골 조정에 40곳에 이르는 역참에 있는 백성과 가축의 피해가 크다는 점을 알리자, 20참으로 축소하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는 고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우회로를 역참에서 제외하고 개경과 의주 간 경로의 20여 곳을 중심으로 정비한 것이다.
무엇보다 참치에 대한 논의는 고려와 몽골 관계를 평가하는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고려의 역제에 몽골의 영향이 있었다는 점은 일찍부터 지적된 바이지만, 모리히라의 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몽골에서 개경이 이르는 참치의 경로를 복원하면서 경로상에 위치한 대부분의 역이 몽골의 의도에 따라 설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고려의 역로망이 몽골제국 전체의 역참 체제 안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종 대 이후 신설된 역의 대부분은 고려와 몽골 전쟁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서경 이북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외의 지역은 고려 전기 이래의 역이 그대로 계승되고 있으며, 고려의 역로망에 대한 몽골의 개입이나 관리가 항상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