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48.7㎝, 입지름 13.1㎝, 밑지름 17.8㎝. 동국대학교박물관 소장.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지리산 화엄사(華巖寺)에 전래되어 왔던 유물로서, 발견되었을 당시에는 아가리 안쪽에 ‘弘治二年□□□(홍치이년)’이라는 명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의 도난 사고로 아가리 부분이 훼손되어 현재는 수리, 복원된 상태이며 ‘弘治(홍치)’ 두 자만이 남아 있다. 홍치는 명(明)나라 효종 연간(1488∼1505)의 연호로서 홍치 2년, 즉 1489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분명한 귀중한 편년 자료이다.
형태는 높이 솟은 아가리가 약간 안쪽으로 들어가 있고 팽배한 둥근 어깨의 선은 고려시대의 매병(梅甁)을 연상하게 한다. 어깨에서부터 점차 좁아져서 아주 잘록해진 허리는 굽 부분에서 급히 반전되어 직선으로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백자 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보물, 1978년 지정)나 순백자 항아리 몇몇 예에서 보인다. 이들은 조선시대 궁중의 연례(宴禮)를 비롯한 여러 의식에서 큰 꽃가지를 꽂아두는 화준(花樽)으로 사용된 듯하다.
문양은 아가리 부분에 연당초문대를 두른 이외에 다른 종속문양은 없고 몸체 전면에 걸쳐 소나무와 대나무를 대담하게 구성하였다. 문양 표현은 세필(細筆)을 사용하여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청화로 농담을 구사하고 있어 백자의 문양 중에는 드물게 회화적인 효과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소나무의 표현에 있어 직각으로 꺾인 가지와 촘촘한 송엽, 그리고 구륵법(鉤勒法)의 사용 등은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의 특징이 드러나는 마원(馬遠) 계통의 회화를 반영한 조선 전기 도화서 화원(畵員)의 그림으로 생각된다. 화원이 자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신증동국여지승람』광주토산조에, “매년 사옹원(司饔院)의 관리가 화원을 인솔하여 어용(御用)의 그릇을 감조(監造)하였다.”는 문헌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백자의 표면은 깨끗하고 세련되게 정리되었으며 약간 담청색을 띠는 백자유를 입힌 뒤 가는 모래를 받쳐 번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