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남은 어려서부터 신익성(申翊聖)의 문하에 드나들었으며, 신익성의 아버지 신흠(申欽)의 눈에 띄어 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시의 재능이 뛰어나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1648년(인조 26)에는 윤순지(尹順之)를 따라 일본에 가서 문명(文名)을 떨쳤다. 성품이 깨끗하고 명예나 이익을 구하지 않아 가난한 생활을 했다.
최기남은 경전에 밝았고 『주역』을 좋아하여 직접 베껴서 탐독하였다. 63세 때에는 병이 나 누워 있으면서도 도연명을 따라 만시(輓詩) 3장을 지었다. 71세 때에는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제문을 짓기도 했다. 현종 초에 실록감인원(實錄監印員)이 되어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때에 나이가 70여 세였다.
75세 때인 1660년(현종 1)에는 교유하던 위항 시인인 정남수(鄭柟壽) · 남응침(南應琛) · 김효일(金孝一) · 최대립(崔大立) · 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동인지 『육가잡영(六家雜詠)』을 간행했다. 이들 6명의 시인이 창작한 절구(絶句) · 고시(古詩) · 율시(律詩) · 오언(五言) · 칠언(七言) · 장단구(長短句) 등 각 체를 모아 실었기 때문에 ‘육가잡영’이라 이름하였다. 최기남은 위항 시인들의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훌륭한 시인들을 많이 길러냈다.
최기남의 시는 당시(唐詩)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다. 이경석(李景奭)은 그의 율시를 두보(杜甫)의 풍이라 하였다. 신익성은 “그의 고체시는 육조(六朝)의 것과 같다. 가행(歌行)은 당나라 시인들의 풍이다. 율조(律調)는 장경(長慶) 이전의 어투를 본받았다.”라고 평했다.
아들 최승태(崔承太)와 최승주(崔承胄)도 이름 있는 시인이었으며, 최기남의 문하에서 임준원(林俊元) · 유찬홍(庾纘洪) · 이득원(李得元) 등의 위항 문학(委巷文學) 시대를 이끌어갈 위항 시인이 많이 배출됐다. 그러므로 그가 조선 후기 위항 문학의 발달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고 하겠다.
저서로는 『구곡집』 7권 2책이 있다. 한시 외의 글은 자서전격인 『졸옹전(拙翁傳)』 한 편뿐이며 나머지는 440여 수의 시로 채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