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한국인 학생들을 모집한 김구(金九)는 군관학교 입교에 필요한 예비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안공근(安恭根)의 건의를 받아들여 1935년 2월 난징 동관두(東關頭)에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학생훈련소(學生訓練所) 또는 몽장훈련소(蒙藏訓鍊所)라고도 불린다.
훈련소를 마치고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면 한국국민당 산하 김구의 항일특무조직인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에 편입되었다. 이후 한국특무대독립군은 1936년 7월 한국국민당청년단(韓國國民黨靑年團)으로 재편되었다.
모집한 학생들은 훈련소 입소 전, 여관에 투숙시켜 놓고 행동을 감시한 다음 데려오는 등 신상 및 사상 검증 절차를 철저히 거쳤다. 훈련소 일과는 오전 7시 기상, 오후 10시 취침이었으며, 예비교육을 위한 일정한 수업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학과목은 중국어, 기하, 대수 등으로 학식이 있는 대원이 주축이 되어 자율적으로 학습하였다.
노종균(盧鍾均)[이명 楊東五, 金東宇] 등 한국특무대독립군 간부들이 수용대원들을 지도하고 감독하며 정신교육을 실시하였다. 김인(金仁)과 하응무(賀應無)가 대원들과 함께 합숙하며 이들을 지도하였다. 학생훈련소의 설치 사실은 대외비 사항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1935년 6월 훈련소의 존재가 일제 정보망에 노출되자, 장쑤성[江蘇省] 의흥현(宜興縣) 장저진(張渚鎭) 용지산(龍池山) 산기슭의 징광사(澄光寺)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9월 징광사와의 계약 만료로 다시 난징[南京]으로 이동하였다.
김구는 수용대원들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를 위해 중국 국민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한국 독립운동을 둘러싸고 일제의 항의가 더욱 격렬해짐에 따라 중국 정부는 입교 허가를 내어주지 않았다.
중국의 기술학교 등에 입교하는 방안을 차선책으로 모색해 보았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으며,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일인 10월 10일이 경과하여도 여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훈련소는 자금난으로 인해 폐쇄되었는데, 어느 시기까지 존치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