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모시짜기는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의 전통 모시 직조 기술이다. 한산은 안개가 잦고 습도가 높아 질 좋은 모시풀의 재배와 모시 제직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가졌다. 한산모시는 조선시대에 들어 한산의 특산품으로서 본격적으로 언급되었고, 현재까지도 모시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에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 제14호로, 201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산모시짜기는 ‘태모시 만들기’, ‘모시 째기’, ‘모시 삼기’, ‘모시 날기’, ‘모시 매기’, ‘꾸리 감기’, ‘제직’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한산모시의 기원은 백제 때 건지산에서 야생의 저마를 재배하여 그 껍질을 벗겨 실을 만들어 천을 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건지산은 행정 구역상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에 속하는데, 서해와 금강을 끼고 있어 안개가 잦고 습도가 높아 질 좋은 모시풀 재배와 제직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가졌다.
한산모시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전국으로 명성을 떨쳤다. 저마는 생육 환경이 까다로워 서천과 충청도 지역, 전라도 일부에서 재배되었는데, 충청도에서 생산된 모시가 품질이 우수해 일대의 특산품으로 여겨졌다. 1469년(예종 1)의 『예종실록』에 따르면 당시 한산과 임천의 생저(生苧)를 토산품 공물로 상정하였다. 또 1751년(영조 27)에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 북거총론편에는 각 지역의 특산물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중 ‘한산과 임천의 모시밭’이 언급되어 있다. 18~19세기에 이르러서는 저산팔읍(苧山八邑), 즉 서천을 비롯해 모시풀이 자라는 산이 있는 충청도의 여덟 개 고을에서 생산된 모시가 많이 유통되었다.
한산모시짜기의 과정은 ‘태모시 만들기’, ‘모시 째기’, ‘모시 삼기’, ‘모시 날기’, ‘모시 매기’, ‘꾸리 감기’, ‘제직’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태모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확한 모시풀의 마디를 꺾어 속대와 껍질을 분리한 후, ‘모시칼’을 이용해 껍질에서 섬유가 되는 속껍질을 벗겨낸다. 이렇게 껍질로부터 벗겨낸 속껍질을 ‘태모시’라고 한다. 모시풀은 환경에 민감하여 건조해지면 중간에 껍질이 끊어질 수 있는데, 끊어진 껍질로는 질 좋은 모시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에 태모시를 만드는 작업은 햇볕이 없는 새벽에 한다. 이렇게 새벽에 만들어진 태모시는 머리 쪽을 한 방향으로 모아서 한 주먹씩 묶은 뒤 은은한 햇볕에 말린다. 태모시를 골고루 잘 말려야 희고 맑고 광택이 좋은 모시를 얻을 수 있으며, 태모시를 잘못 말리면 검은 흠이 생기거나 색이 얼룩덜룩해져서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두 번째, 잘 말린 태모시는 헝클어지지 않게 감은 후 째기 좋도록 1~2시간 정도 물에 담근다. 그 후 엉키지 않게 머리 부분을 매듭지어 엄지에 감은 뒤, 한 가닥씩 풀어 이로 잘게 쪼개는데 이를 ‘모시 째기’라고 한다. 태모시를 얼마나 가늘고 균일하게 쪼개는지와 보풀의 유무에 따라 모시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에 모시 째기는 한산모시짜기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보풀의 정도는 모시를 째는 사람의 침 분비량과 성분에 따라 달라진다. 모시 째기가 끝나면 매듭지은 머리 부분에 엉키는 곳이 생긴다. 묶었던 머리 부분의 매듭을 풀고, 엉킨 곳을 입에 문다. 그 후 손에 물을 묻혀가면서 엉킨 부분에서 한 올씩 뜯어내고, 뜯어낸 모시올을 물에 적신다. 적신 모시올 부분을 도마처럼 생긴 ‘톱반’ 위에 올려 ‘모시톱’으로 훑어 매끈하게 만든다. 모시톱으로 훑은 부분은 참빗으로 빗어내어 한 올 한 올 분리가 잘 되도록 정리한다.
세 번째, 정리한 모시올 뭉치는 기둥 형태의 두 개의 ‘쩐지’에 걸쳐 놓은 뒤, 모시올 뭉치에서 한 올씩 빼내어 무릎에 올려 놓고 손바닥을 비벼서 두 올의 모시올을 하나로 삼아 모시실을 만든다. 비슷한 굵기의 모시올끼리 이어주어야 하므로 굵은 올은 다시 가늘게 째서 굵기를 조절해준다. 삼은 실은 광주리에 차곡차곡 쌓아 똬리처럼 동그랗게 감아 둔다. 한 개의 모시굿이 될 만큼 실을 삼으면 모시끈 두 개를 사용해 둥글게 감은 모시를 묶어 ‘모시굿’을 만든다.
네 번째, ‘모시 날기’는 직조하고자 하는 직물의 길이와 승수(升數)에 맞춰 모시굿을 풀어 경사로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하는 과정이다. 직물의 촘촘한 정도는 ‘승(升)’으로 나타내며, 1승은 80올의 경사를 의미한다. 승수가 커질수록 직물은 섬세해 지는데, 7~8승의 모시 한 필을 위한 경사로 10개의 모시굿이 필요하다. 모시 날기가 끝나면 경사 한 올 한 올을 바디 구멍에 꿰어 넣는 작업을 한다.
다섯 번째, ‘모시 매기’는 모시 날기가 끝난 경사에 콩풀로 풀을 먹이고, 도투마리에 감는 과정이다. 바디를 꿴 경사의 한쪽 끝을 도투마리에 매고 반대쪽 끝은 ‘끌개’에 묶어 경사가 팽팽해지도록 고정한 다음, 매기솔로 경사에 콩풀을 골고루 묻힌다. 콩풀이 마르면 경사를 도투마리에 말아 감는다.
여섯 번째, ‘꾸리 감기’는 위사로 사용할 꾸리를 만드는 과정이다. 꾸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모시굿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다음 한 손에는 대나무 가락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모시실을 쥐어서 실을 가락에 둘둘 감아 꾸리를 만든다. 만든 꾸리는 북에 끼운다.
일곱 번째, 경사와 위사가 모두 준비되면, 베틀을 조립하여 제직 준비를 한다. 경사가 감긴 도투마리를 베틀에 설치하면, 기술자는 베틀신끈을 발로 잡아당겨 제직을 한다. 베틀신끈을 발로 잡아당기면 경사가 벌어지고, 벌어진 틈에 꾸리가 끼워진 북을 좌우로 보내 모시를 제직한다. 제직이 끝난 모시 직물은 물에 씻어 콩풀을 모두 빼내고, 잘 말린 뒤에 보관한다. 콩풀을 빼지 않으면 직물에 곰팡이나 벌레가 생길 수 있다.
이러한 한산모시짜기 기술은 여성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다. 한산모시를 생산하는 여성은 대부분 14, 15세부터 어머니나 시어머니로부터 모시짜기 기술을 배워 소득을 창출함으로써 가계 경제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모시의 수요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모시를 짤 수 있는 기술자들도 점차 줄어들었다. 모시짜기 기술자의 보호 및 전승을 위해 1967년에 한산모시짜기를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하였고, 문정옥(文貞玉)을 한산모시짜기 기능 보유자로 지정하였다. 또 2000년에는 방연옥(方連玉)을 기능 보유자로 지정하였으며, 2011년에는 한산모시짜기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6년에는 문정옥 기능 보유자가 별세하여 2022년을 기준으로 한산모시짜기 기능 보유자는 방연옥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