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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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마식물의 인피 섬유로 제직한 직물.
이칭
이칭
마포(麻布), 포(布), 마직물(麻織物)
약칭
마(麻)
속칭
모시, 삼베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마직은 마식물의 인피 섬유로 제직한 직물이다. 마직물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복식의 재료로 사용된 역사가 길다. 기원전 3000년경의 신석기 유적에서 마섬유가 붙은 가락바퀴와 뼈바늘, 물레 등이 발견되어 우리 민족이 당시 마섬유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마직물은 고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직물이며, 오늘날까지도 여름철 옷감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마직물의 제직 기술은 ‘한산모시짜기’, ‘삼베짜기’ 등의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며, 특히 한산모시짜기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목차
정의
마식물의 인피 섬유로 제직한 직물.
내용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마직물을 사용하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기원전 3000년경의 신석기 유적인 궁산 패총에 마섬유가 붙어 있는 가락바퀴와 뼈바늘, 물레 등이 발견되어 당시 이미 마직물을 소재로 하여 직조 · 봉제한 옷을 만들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마직물은 고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직물이다. 마직물은 마식물의 줄기의 껍질을 벗겨 가늘게 쪼개 이어 만든 실로 짠 직물을 말한다. 마식물은 대마(大麻), 저마(苧麻), 아마, 황마 등 종류가 많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부터 대마와 저마를 직물의 소재로 애용하였다.

가야의 양동리 200호분(2세기 후반-3세기 초반), 지산동 30-2호분(5세기)과 44호분(5세기), 옥전 M1호분(5세기)과 35호분(5세기), 신라의 심천리 석곽130호(4세기), 임당2호북분(5-6세기), 말흘리유적(7-10세기), 백제의 수촌리 2-1호분(4세기 후반-5세기 초반)과 2-3호분(4세기 후반-5세기 초반), 2-4호분(4세기 후반-5세기 초반), 무령왕릉(6세기) 등에서는 대마 직물이, 가야의 옥전 M1호분과 M3호분, 35호분, 임당2호북분, 말흘리유적, 무령왕릉 등에서는 저마 직물도 출토되었다.

그런데 삼국시대까지의 문헌에서는 대개 대마와 저마를 구분하지 않고 ‘포(布)’라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중국의 후한(後漢, 25-220년)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자전(字典)인 『소이아(小爾雅)』 광복(廣服)에서는 “마저갈왈포포통명야(麻紵葛曰布布通名也)”라고 하여, 오늘날 직물 전체의 의미로 사용되는 포라는 용어가 당시에는 대마 직물과 저마 직물뿐만 아니라 갈포(葛布)까지 포함하는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고대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는 “예(濊)에는 마포(麻布)가 있다”, “부여인은 백포(白布)로 만든 큰소매가 달린 포(袍)와 바지[袴]를 입었다”, “ 변한진한에서 광폭 세포(廣幅細布)를 제직하였다”, “변한이 낙랑에게 변한포(弁韓布)를 바쳤다” 등의 기록이 있다. 또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 『위서(魏書)』에는 “고구려인은 포, 백(帛), 피(皮)로 의복을 지어 입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대 중국의 여러 고문헌에 남아 있는 우리 민족의 차림새에 대한 기록을 통해 동예, 부여, 변한, 진한, 고구려 등 당시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마직물을 애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의 헌안왕 860년에는 “부유한 사람이 의복으로 사치할 수 있음에도 항상 마(麻)와 저(紵)로 만족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구절을 통해 통일신라시대에는 대마[麻]와 저마[紵]의 명칭을 명확하게 구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직조와 시침을 관장하던 관청인 잡직서(雜織署)에 마직장(麻織匠)을 두고 품질이 좋은 마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였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는 흑마포(黑麻布), 황마포(黃麻布), 오승포(五升布), 20승 마포(二十升 麻布), 세포(細布), 백저포(白紵麻), 20승 백저포, 사저포(紗紵布), 문저포(紋紵布) 등 마직물의 색상과 섬세함, 무늬의 유무와 관련된 다양한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에도 마포, 백마포, 흑마포, 흑세마포, 포 등의 마직물과 관련된 다양한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 1419년(세종 1)에는 명(明)의 황제에게 황색저포(黃細苧布), 백세저포(白細苧布), 흑세마포(黑細麻布), 사마교직포(絲麻交織布), 사저교직(絲苧交織)을 진상하여, 당시 우리의 마직물이 진상품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록을 조사해 보면, 태종, 세종, 성종 대에는 저마교직포(苧麻交織布), 사마교직포, 사저교직 등 교직물도 보인다. 14세기 문수사 사저교직답호(絲紵交織搭胡), 16세기 관음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의 직물 조각, 16세기 김흠조 부부 묘에서 출토된 단령 등의 유물을 통해서 경사(經絲)는 견사, 위사는 저마사를 사용한 사저교직물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마직물은 대부분 평직으로 직조하기 때문에 직물 조직이나 무늬가 다양한 견직물에 비해 단순하여 직물의 품질과 가치가 섬세함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마직물의 섬세한 정도는 승수(升數)로 표현하는데, 승수는 직물의 폭에 사용된 경사의 올 수를 기준으로 한다. 1승(升)은 경사의 올 수가 80올인 경우를 말하며, 승수가 클수록 섬세한 것이다.

『삼국사기』의 「잡지(雜志) 색복조(色服條)」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통일신라 흥덕왕(826-836년)대의 복식에 관한 교서에 따르면, 당시에는 마포의 승수를 신분에 따라 규제하였는데 최저 12승에서 최고 28승까지 기록되어 있다. 또 경문왕(869년) 때에는 30승 저삼단(三十升 紵衫段)을 당나라에 보낸 기록이 있다.

이러한 고대의 마직물이 얼마나 섬세하였는지는 출토 유물과 현재 국내에서 수직(手織)으로 짜는 마직물 중 가장 섬세한 한산모시와 비교해 봄으로써 가늠할 수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저마 직물 중 가장 섬세한 것이 경사의 밀도가 1cm 당 약 50올인데, 고대의 저마 직물의 폭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직물 폭이 30cm에서 35cm 정도인 오늘날의 한산모시의 직물 폭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직물 폭이 30cm이라고 할 경우에는 경사는 약 1,500올로 18승에 해당하며, 직물 폭이 35cm이라고 할 경우에는 경사가 약 1,750올로 21승에 해당된다. 오늘날 한산모시의 제14호 국가무형유산 기능 보유자가 생산한 모시가 12승임을 감안하면, 무령왕릉의 저마 직물은 6-9승 정도 더 크므로 직물폭 당 경사가 한산모시보다 약 480-720올이나 더 많아 그 섬세함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사』에는 20승 마포와 20승 백저포를 제직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특히 백저포의 섬세함이 마치 매미의 날개[蟬翼]와 같다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섬세함은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아미타불복장물(1302년), 해인사 목조비로자나불복장물(10-14세기), 문수사 금동여래좌상불복장물(1346년) 등에 포함되어 있는 저마 직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착용자의 신분, 의복의 용도, 교역의 대상 등에 따라 저포(苧布, 紵布)의 승수를 제한하였다. 10승에서 15승까지의 저포는 품질이 좋은 것으로 취급되어 주로 외국과의 교역 물품에 사용되었고, 일반 복식에는 6-9승, 상복(喪服)에는 5승의 것을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9승 백저포, 12승 백저포, 세저포, 백세저포 등 다양하였다.

1927년의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에는 함경도의 북포(北布), 강원도의 강포(江布), 경상도의 영포(嶺布), 안동의 안동포(安東布) 등 각 지역의 특산품인 대마 직물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북포 중 매우 섬세한 것은 한 필이 바리 안에 모두 들어간다 하여 발내포(鉢內布)라고 하였다.

현대에는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마직물 수요가 감소하면서 기술자도 줄어들었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마직물의 제직 기술을 국가무형유산으로, 기술자를 기능 보유자로 지정하여 보호 및 전승을 도모하고 있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마직물 제직 기술은 ‘한산모시짜기’와 ‘삼베짜기’가 있다. 한산모시짜기는 1967년에 제14호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고, 같은 해에 문정옥(文貞玉)이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는 방연옥(方連玉)이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2011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16년 문정옥 기능보유자가 별세하여 2022년을 기준으로 한산모시짜기 기능보유자는 방연옥이 유일하다.

삼베짜기는 2019년에 제140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경상북도 안동에 위치한 ‘국가무형문화재안동포짜기마을보존회’를 보유 단체로 인정하였다. 그 외 ‘곡성의 돌실나이’는 1970년에 제32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19년 12월 31일에 해제되고 삼베짜기에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삼국지(三國志)』
『고려도경(高麗圖經)』

단행본

민길자, 『한국 전통직물사 연구』(한림원, 2000)
심연옥, 『한국직물오천년』(고대직물연구소출판부, 2002)
민길자, 『전통 옷감』(대원사, 2004)
『무령왕릉-출토 유물 분석 보고서(Ⅰ)-』(국립공주박물관, 2005)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한산 세모시짜기 · 청양 춘포짜기』(민속원, 2011)
홍나영·신혜성·이은진, 『동아시아 복식의 역사』(교문사, 2012),
강순제·김미자·김정호·백영자·이은주·조우현·조효숙·홍나영, 『한국복식사전』(민속원, 2015)
『모시짜기』(국립무형유산원, 2017)

논문

민길자·이순선, 「우리나라 직물제직기술에 대한 연구」(『한국의류학회지』 8-2, 한국의류학회, 1984)
박윤미, 「말흘리 유적 출토 수착직물의 특성과 유물의 재구성」(『한국고고학보』 64, 한국고고학회, 2007)
박윤미, 「백제 직물의 특성과 직조 기술」(『백제학보』 12, 백제학회, 2014)
심연옥, 「전통 사저교직포의 전승과 현대적 활용」(『한복문화』 19-4, 한복문화학회, 2016)
이지원, 「조선시대 교직 연구」(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9)
최규성, 「고려인들의 삶과 전통복장에 대한 이해」(『복식문화학회 학술세미나』 2002, 2002)
최승연, 「한국 전통 평직물의 실과 조직의 특징에 관한 연구」(『복식문화연구』 21-1, 복식문화학회, 2013)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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