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羅)는 이웃한 여러 올의 경사가 서로 꼬이면서 위사와 교차된 익직물(搦織物), 즉 익조직(搦組織)의 직물이며 ‘라’라고도 한다. 나는 이웃한 경사들이 서로 꼬이면서 경사가 이동하고 남은 공간이 생김에 따라 표면의 투과율이 높아져 직물에 비쳐 보이는 부분이 생긴다. 또한 나는 여러 올의 경사가 꼬이면서 그물처럼 직조되어 직물이 약간의 탄력을 갖게 된다.
나는 무늬의 유무, 직물의 조직 등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무늬의 유무를 기준으로, 무늬를 직조하지 않은 것은 무문라(無紋羅) 또는 소라(素羅), 무늬를 직조한 것 문라(紋羅)나 유문라(有紋羅)라고 부른다.
직물의 조직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전통 익직물은 한 조를 이루며 꼬이는 경사의 올 수에 따라 4경교(四經絞), 3경교(三經絞), 2경교(二經絞)로 구분할 수 있다. 이웃한 네 올의 경사가 한 조를 이루어 꼬이면서 위사와 교차하면 4경교, 이웃한 세 올의 경사가 한 조를 이루어 꼬이면서 위사와 교차하면 3경교라고 한다. 익직물의 분류와 호칭은 시대나 민족,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익직물 중에서도 4경교와 3경교는 나로 호칭한다. 반면 이웃한 두 올의 경사가 한 조를 이루어 꼬이면서 위사와 교차하는 2경교의 익직물은 사(紗)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나를 사용한 것에 관한 기록은 삼국시대 무렵부터 찾을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백라(白羅), 청라(靑羅), 비라(緋羅) 등, 계급에 따라 색을 달리하여 나를 관(冠)에 사용했으며, 백제의 왕은 오라관(烏羅冠), 즉 검은색의 나를 관에 사용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 색복조(色服條)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통일신라 흥덕왕(826~836)대의, 복식에 관한 교서(敎書에 따르면, 당시 나는 6두품과 5두품의 복두(幞頭)에만 허용되어 고급 직물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지금까지 보고된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나 유물은 평양 근교에 있는 왕우(王旴)의 묘에서 출토된, 12세기의 것으로 알려진 마름무늬[耳杯紋]의 4경교 나이다. 그 외 46세기의 가야 고분과 무령왕릉, 부여 왕릉원(67세기경), 경주 불국사 석가탑(810세기경),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아미타불복장(1302), 장곡사 약사여래불복장(1346) 등 나 유물은 주로 삼국시대의 고분과 고려시대의 불복장물 등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4경교의 나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유물에서 많이 보이며, 3경교의 나는 주로 고려시대 유물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려시대까지 애용되었던 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사용이 급격히 감소하여 유물의 수도 현저히 적다. 조선시대의 나 유물로는 파평윤씨(?1566) 묘, 여흥민씨(15861656) 묘, 인천 석남동 무연고 묘에서 출토된 여성 쓰개인 너울과 1562년에 개금(改金) 중수(重修)한 서울 수국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및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보자기 등에서 4경교의 나가 사용된 사례가 드물게 있다. 조선시대에는 제직 방법이 상대적으로 단순한 2경교의 사가 더 많이 사용되고, 나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나의 직조 기술은 현재 단절된 상태이다.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는 전통 직물 중 명칭에 ‘라’라는 글자가 붙은 ‘항라’는 직물 조직으로 보면 나 조직이 아니고 2경교의 사(紗) 조직과 평직이 혼합된 형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