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방직주식회사(朝鮮紡織株式會社)는 면화(綿花)의 재배와 매매, 면사(綿絲)나 면포(綿布)의 방직 ‧ 판매, 면업과 관련한 사업에 대한 투자 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방직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2월에 일본 도쿄에서 노다 우타로[野田卯太郞], 마고시 쿄헤이[馬越恭平], 야먀모토 조타로[山本條太郞]가 설립 계획을 수립하였고, 같은 해 11월에 부산부(釜山府) 범일정(凡一町) 700번지(현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설립되었다.
조선방직주식회사의 조업은 1922년부터 시작되었으나 1923년에 화재가 발생하였고 그로 인한 대규모 자산 손실을 겪은 후 공장 재건에 착수하여 1925년부터 조업을 재개하였다. 1926년에는 가장 널리 재배되는 목화의 품종인 육지면(陸地棉)의 매수권(買收權))을 확보하고 경상남도 지역에 조면 공장(繰綿工場)을 건설하였다. 연이어 경상북도 지역 면화의 매수권을 획득하고 대구 공장을 비롯하여 공장 증설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1935년에는 부산에 인견(人絹) 공장 건설에 착수하여 인견포(人絹布)를 생산하였으며, 같은 해에 기계제 염색 공장도 건설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하원준이 조선방직의 초대 관리인으로 선임되어 1945년부터 재가동되었다. 2대 관리인인 최사열이 1946년에 ‘한일실업공사’로 회사 이름을 변경하였으나 이듬해 3대 관리인인 정명석이 다시 ‘조선방직공사’로 개칭하였다. 1948년에는 정호종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회사의 이름을 본래의 명칭인 조선방직주식회사로 변경하였다.
1951년에는 이승만 정부에 의해 강일매(姜一邁)가 새 관리인으로 부임하였으나, 조선방직의 관리인이었던 정호종을 비롯하여 경영진을 포함한 20명을 구속한 ‘조방 사건’이 발생하였다. 조방 사건으로 기존 경영진이 배제된 후 조선방직은 일시적으로 국영 기업이 되었다가, 1955년에 강일매에게 불하되었으나 방만한 경영으로 회사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인 1951~1952년에는 조선방직 노동자들이 사장인 강일매의 퇴진을 요구하는 ‘조방 파업’이 발생하였다. 1956년에는 정재호가 부산의 조선방직을 비롯하여 대구의 삼호방직, 대전의 대전방직 등 3개사를 인수하였으나, 1968년에 막대한 부채를 안은 채 부산시가 인수하였다. 1969년에는 부산시에서 법인 청산 절차를 밟아 조선방직주식회사를 공식적으로 해산하였다.
조선방직주식회사는 1925년 조업 재개 이후 제품 개량, 상표 개발, 인지도 제고를 적극적으로 도모하여 1928년 무렵에는 조선 면사포(綿絲布) 시장의 25%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개발된 도요타[豊田, トヨタ] 자동 직기 443대를 도입하여 생산비를 절감하였다. 그러나 1930년에는 조선방직주식회사의 노동자들이 장시간의 노동, 저임금, 폭력적인 탄압으로 인해 대대적인 파업을 단행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방적기 4만 720추, 연사기 6,760추, 면직기 1,232대, 인견 직기 319대, 모포 직기 25대 등의 설비와 전국 17개 지역에 설치한 조면 공장을 비롯하여 2차 가공 공장으로 대구 메리야스 공장을 보유하고 있어, 실과 면의 매수에서부터 방적 ‧ 염색 ‧ 나염 ‧ 피복에 이르는 일관된 생산 체제를 구축하였다.
조선방직주식회사는 우리나라 면방업(綿紡業)의 효시이다. 1969년 조선방직주식회사가 해산된 이후 현재까지도 회사가 있었던 범일동 일대를 ‘조방 앞’이라 부른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