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화베이[華北] 지역을 점령한 이후, 김구(金九)는 한국국민당원 김영호(金英浩) 이하 6명을 화베이에 파견하여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의 부활과 일제의 군사와 기타 일반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톈진에서 한족항일동지회 중앙집행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동지회의 발기인은 최백지(崔白池), 김득수(金得水), 황대(黃碓), 최단계(崔檀溪), 조우일(趙愚一), 김재평(金在平), 김생수(金生水), 최계중(崔繼众), 이기직(李基直), 이학우(李學宇), 이은원(李恩遠), 오민화(吳民華), 백대원(白大源), 최광원(崔光源), 신은애(申恩愛), 조우이(趙愚二), 김혜주(金惠舟), 조운삼(趙雲三), 박세영(朴世榮), 조계동(趙繼東), 고령(高嶺) 등이었다.
한족항일동지회는 「발기 선언문」과 「재주화북동포(在住華北同胞)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발기 선언문」에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제의 만행을 적시한 후, 안으로는 동포 자체의 역량을 집중 단결하고, 밖으로는 대일 작전의 우군을 연합 확대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선언하였다. 발기와 함께 잠행(暫行) 장정(章程)을 제정하고 간부를 선임하였다. 동지회의 제도는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를 채택하였다.
「재주화북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에서는 먼저 동아시아의 시세가 날로 험악해져서 중일 간에 벌써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말하고, 이러한 시기를 이용하여 우리도 조국 광복을 실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화베이 일대에 거류하는 한인들 중 아편 판매와 밀수입 등 부정 사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고, 스스로 아편을 흡입하는 이들이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고 정도로 돌아와 혁명의 기치 아래 모여 항일전선을 굳게 결성하여 최후 일각까지 싸워 원수 일본을 박멸하자고 부르짖었다.
이후 다시 성명서를 내어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기관지에 한족항일동지회가 민족혁명당의 지도 아래 발기되었다고 기재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이외에는 다른 구체적인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