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천유고 ()

한천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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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
문헌
조선 후기의 시인, 정민교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39년에 간행한 시문집.
정의
조선 후기의 시인, 정민교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739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739년(영조 15) 정민교의 문인 오도옥(吳道鈺) 등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저자의 부인 변씨가 정내교(鄭來僑: 정민교의 형)에게 유고수습(遺稿收拾)을 부탁한 지 7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권두에 오원(吳瑗)의 서문이, 권말에 조현명(趙顯命)과 정내교의 발문이 있는데, 모두 그들의 친필을 판각한 것이다.

서지적 사항

2권 1책. 목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

권1에 시 282수, 권2에 서(序) 1편, 기(記) 1편, 논(論) 1편 등 문 3편이 실려 있고, 부록으로 정내교가 지은 「망제계통본말(亡弟季通本末)」과 조현명의 묘지명, 안중관(安重觀)의 묘표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작품은 대부분이 시인데, 그 중 「군정탄(軍丁歎)」은 정민교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시는 조선 후기의 문란했던 세제(稅制)인 군정 가운데 황구첨정(黃口簽丁: 젖먹이 어린애까지 군적에 올려 군포를 징수해 갔다는 관원의 횡포를 이름)의 폐해를 사실적으로 그린 서사시로서 42행의 7언시이다. 내용은 작자가 우산(牛山)이라는 곳을 지나가다가 울고 있는 아낙네를 만나 사정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심경을 피력한 것이다.

여기에서 정민교는 첨정이란 군대를 충족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을 뿐이지,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게 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는 현관을 준열히 꾸짖는다. 또한, 질병으로 백성들은 절반이나 죽었고 거기에다 백골징포는 더욱 혹독한 현 상태로 보아 이 법은 고쳐지지 않을 것 같으니, “일찌감치 죽어 버려 네 남편을 쫓아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그 아낙네에게 충고한다.

이러한 투의 작품은 어떤 시인의 사회 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이는 정민교가 당시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민교의 시는 ‘정진어신(情眞語新)’·‘사치섬일(思致贍逸)’이라는 평을 들었고, 조현명은 발문에서 “때때로 기갈운삽(氣竭韻澁)함이 보였으니 이것이 그가 35세로 요절하게 된 까닭”이라고 하였다. 정민교의 작품은 홍세태(洪世泰)·조현명과 수창(酬唱: 시가를 서로 주고받으며 읊음)한 것이 많다.

권2의 문은 시인으로 활동하였던 정민교의 문재(文才)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며, 부록의 「망제계통본말」은 정민교의 짧은 생애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형이 쓴 것이라는 점에서, 정민교의 인물됨과 가정사를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완암집(浣巖集)』
『유하집(柳下集)』
『귀록집(歸鹿集)』
『조선평민문학사(朝鮮平民文學史)』(구자균, 고려문화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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