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경인 공업지대에 대한 전력공급을 위해 당시의 한강수력전기주식회사에 의하여 총 설비용량 10만8000㎾, 총 저수량 10억2000만㎥의 댐수로식 발전소를 착공, 1944년 5월에 2만7000㎾용량의 제1호기가 준공되었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제2호기가 준공되었으며 제3호기는 기기설치 도중에, 제4호기는 기초공사 완료 후에 각각 광복을 맞이하여 공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발전소는 38도선 이북에 위치함으로써 민족의 수난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해야 했다.
1946년 5 · 14단전 후 우리는 심각한 전력난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북한은 일부 시설만을 가동하여 38도선 이북의 강원도 북부지역에만 전력을 공급하였다. 그 뒤 시설이 불필요하여 제2호 발전기를 규모와 낙차가 비슷한 장진강발전소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6 · 25전쟁의 발발로 광복 후 5년만인 1950년 9월에야 우리의 손으로 넘어왔다.
전쟁중에는 심각한 전력난을 벗어나기 위해 같은 해 11월에 제1호기의 복구를 완료하고 시운전을 시작하였으나 북한의 역습으로 빼앗기고 빼앗는 공방전을 다섯 차례나 치른 끝에 1951년 4월 완전수복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전쟁의 와중에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되어 화천발전소는 전쟁의 상처를 가장 많이 받은 곳 중의 하나였다. 이 발전소를 사이에 두고 아군과 적군이 치른 격전은 극에 달하였고, 특히 1951년 4월과 5월에 걸쳐 보병 6사단과 해병 제12연대 장병들이 유엔군의 좌우지원을 받아 중공군 제10 · 25 · 27군의 3개군을 완전섬멸하여 수장을 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당시 현지를 방문한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으로 ‘파로호(破虜湖)’라는 친필휘호를 내리는 등, 당시 이 발전소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는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다.
그 뒤 1952년 다시 복구공사를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제1호기의 복구와 1953년 7월 제2호기의 복구완료로 시설용량은 5만4000㎾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하에서 중단되었던 제3호기 설치공사도 1957년 9월 완료되어 설비용량은 8만1000㎾로 증가되었다.
1961년 전력 3사 통합 이후 제2차 전원개발 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제4호기의 증설을 착수, 1968년 8월 완공하였다. 이로써 설비용량을 현재의 10만8000㎾를 보유하게 되어 연간 3억2600만㎾h의 전력생산과, 10억2000만㎥의 방대한 저수지를 이용하여 한강수계의 홍수조절 및 수도권용수 확보하였다.
또한 하류발전소에 대한 발전용수 공급 등 중요한 구실도 담당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생산된 전력은 154㎸ 송전선을 이용하여 경인지구 산업생산의 원동력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로 인하여 이 발전소에 대한 중요성은 한층 높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