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정권은 사회적 소유제도와 중앙집권적 계획경제 하에서 정치적 선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창의성이나 헌신성을 기대하기 힘들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각종 노력경쟁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노력영웅운동’은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 노력영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경제 및 건설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조선로동당을 위해 위훈을 떨친 사람에게 수여하는 명예 칭호로서 이는 소련의 ‘스타하노프 노동자’ 칭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북한은 경제계획을 수행함에 있어서 목표 달성을 위하여 생산성 제고가 필수적이었다. 이에 따라 북한 당국은 기존의 경제체제는 그대로 유지한 채, 노동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한 각종 선동집회를 강화하는 한편, 인민의 노동을 최대한 동원하는 노력경쟁운동을 전개하면서 단위당 생산량을 높이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노력영웅 칭호는 1951년 7월 17일 제정되었고, 북한은 노력영웅을 “당의 유일사상체계가 튼튼히 선 사람으로서 인민경제의 일정한 부문에서 김일성 교시와 당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투쟁에서 노력적 위훈을 떨침으로써 혁명과 건설에 크게 이바지한 일꾼에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김일성이 주는 영예칭호, 또는 그 칭호를 받은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노력영웅은 최고의 영예인 ‘공화국영웅’ 칭호보다 한 단계 아래이며, 훈장과 메달이 함께 수여된다. 일반 노동자 뿐 아니라 군인, 체육인, 문화예술인, 과학자 등도 수여받는 등 수여 대상의 범위가 넓은 편이다. 이 칭호는 여러 차례 수상할 수도 있으며, 두 차례 수상할 경우 ‘2중 노력영웅’으로 영예가 더해진다.
북한은 노력영웅운동을 통하여 생산성을 제고하는 방식으로 계획경제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지만, 원천적으로 일당독재 전체주의체제의 특성이 가진 관료주의와 형식주의의 폐해로 말미암아 생산성 제고는 아예 기대하기 어려웠으며, 오늘의 총체적인 경제난국을 초래한 주요원인이 되었다.
1946년 2월 15일 공산당 분국 제4차 확대회의집행위원회에서 ‘노력영웅운동’이나 ‘생산경쟁운동’의 전개를 결의하였다. 특히 북로당은 1947년도 인민경제발전계획을 발표하면서 1946년도의 2배 이상 높일 것을 제시하고, 공장·기업소의 당조직과 농촌의 당조직에도 예정계획 완수에 대한 책임을 부과하였다. 해당 생산기관이나 인민위원회에 부과된 계획목표를 완수하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조직의 주요임무가 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와 북로당은 증산경쟁운동을 계획대로 추진하기 위해 건국사상동원운동을 적극 전개하고, ‘생산돌격운동’ 등 각종 경쟁운동을 전개하면서 농촌에서는 ‘모범농민’, 공장에서는 ‘모범노동자’를 표창하여 ‘조선 경제건설의 노동영웅’으로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이후 ‘노력영웅’이라는 말은 6·25전쟁 중인 1951년 7월 1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정령을 통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사용된 정확한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력영웅’이다. 북한은 이후 ‘노령영웅’ 양산을 통한 생산성 제고를 위해 대중운동을 펼쳐나간다.
북한은 아울러 1950년대 후반부터 대중경제운동으로서 노력경쟁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1959년 3월에는 모든 노동자를 공산주의식으로 개조하여 이들 노동력의 대량동원을 통하여 생산증대를 도모하는 천리마운동을 시작하였고, 1975년 말부터는 ‘3대 혁명 붉은기 쟁취운동’을 전개하였다. 1982년 7월에는 ‘1980년대 속도창조운동’을 창안하였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운축전 준비와 관련하여 1988·1989년 기간에는 두 차례에 걸쳐 ‘200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2009년에는 경제 영역에서의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을 목표로 ‘150일 전투’, ‘100일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숨은 영웅 따라 배우기 운동’, ‘경공업 혁명 청년선봉대 쟁취를 위한 사회주의 경쟁’ 등 각종 노력경쟁운동을 펼친 바 있다.
계획경제 목표 달성과 생산성 제고를 위한 노력영웅운동은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고질적인 폐해, 즉 관료주의와 형식주의, 인센티브의 결여 등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해 당초 목표로 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