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관식 ()

민관식
민관식
체육
인물
해방 이후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체육인. 관료.
이칭
소강(小崗)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18년 5월 3일
사망 연도
2006년 1월 16일
출생지
경기도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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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대한체육회 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한 체육인. 관료.
생애 / 활동사항

1918년 개성에서 태어난 민관식은 경기고의 전신인 경성제일고보(1937)와 수원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대)를 졸업한 후 일본에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농예화학과를 졸업했다. 6·25전쟁이 끝난 후 고려시보사 사장(1953∼1967)으로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1954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 동대문구에서 3·4·5대 민의원과 6대 국회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에는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어 관계에 진출했다가 1978년 12월 10대 총선 때 정치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 · 중구에서 공화당후보로 당선되어 정계에 복귀했다.

특히 민관식은 체육계와 오랜 기간 깊은 인연을 맺어 “한국스포츠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렸는데 1964년 도쿄올림픽대회를 앞두고 대한체육회 회장에 취임해 1971년까지 한국체육계를 선도했다. 또한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위원장을 겸하며 1966년 무교동 체육회관과 태릉선수촌을 건립해 한국스포츠 근대화의 토대를 이루었다.

생전에 국가대표 훈련장 건립을 가장 자랑스러운 공으로 내세웠던 그는 “선수촌을 지으려면 태릉으로 가보라”는 꿈을 꾸고 난 뒤 태릉의 부지를 물색했다는 일화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리고 축구와 육상, 테니스, 탁구, 정구협회 등 5개 종목에 걸쳐 단체장을 맡았던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테니스 마니아로 1973년 자신의 아호인 소강(小崗)을 딴 “소강배 전국남녀중고교테니스대회”를 창설해 약 40년 동안 개최해오고 있다.

“건강을 잃으면 인생 전부를 잃는다”는 생활신조를 지녔던 그는 미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으며 운동을 즐겼으며 마지막까지 한국스포츠의 발전을 기원하다 2006년 1월 16일 타계했다.

상훈과 추모

민관식은 한국스포츠를 크게 발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1970), 청조근정훈장(1974), 체육훈장 청룡장(1989), 국제올림픽위원회(IOC) 100주년 기념훈장(1995) 등을 차례로 수상했다. 그의 행적을 추모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해 「태릉선수촌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 흉상 제막식」(2007), 「수원광교박물관 “소강 민관식과 그의 컬렉션” 특별기획전」(2010) 등이 개최되었다.

참고문헌

『격랑을 헤친 지혜·용기』(소강 민관식박사 팔순기념문집 편집위원, 영 출판사, 1997)
「소강 민관식과 그의 컬렉션」(양희동, 조선일보, 2010.6.30)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중앙일보, 2005.10.24∼2005.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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