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릉은 북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에 있는, 고려 전기 제7대 목종과 왕비 선정왕후 유씨가 묻힌 왕릉이다. 목종은 1009년(목종 12) 12월 강조에 의해 폐위된 후 천추태후와 충주로 가던 중 적성현에서 시해되었으며 시신은 화장당하여 공릉이 조성되었다. 1012년(현종 3) 현종이 공릉을 개성 동쪽으로 이장하고 의릉이라 개칭하였다. 폐위된 목종의 제1비인 선정왕후 사후에 선정왕후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현재 의릉은 정확한 위치가 알려지지 않아 능제나 구조 및 시설은 밝혀진 것이 없다.
목종(穆宗)은 1009년(목종 12) 12월 기축일에 강조(康兆)가 보낸 자객에 의해 적성현(積城縣)에서 시해당했고, 다음 달에 개성현 남쪽에서 시신을 화장하였다. 이때 조성된 목종의 능(陵)은 공릉(恭陵)이라고 하였으며, 시호는 선양(宣讓), 묘호(廟號)는 민종(愍宗)이라고 하였다. 이는 모두 강조가 지은 이름이다. 이러한 사실은 왕위를 이은 현종(顯宗)도 몰랐으며, 거란(契丹)이 침략해 와서 문책함으로써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 의하면, 현종이 1012년(현종 3)에 개성(開城) 동쪽으로 이장하고 능호(陵號)를 의릉(義陵)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폐위된 목종의 제1비인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가 사망하자 의릉에 합장되었다. 의릉이 개성 동쪽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므로 묘제(墓制)와 널방의 구조 등을 파악할 수 없다.
고려 당시 왕릉의 관리는 제릉서(諸陵署)라는 담당 관서에 관원을 두어 관리하였고, 왕릉은 위숙군(圍宿軍)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으므로 목종 의릉에도 위숙군을 배치하였다. 조선 태종(太宗)은 1401년(태종 1)에 고려 태조 현릉(顯陵), 현종(顯宗) 선릉(宣陵), 문종(文宗) 경릉(景陵), 원종(元宗) 소릉(韶陵)에만 수호인(守護人)을 두고 나머지 왕릉은 소재지인 개성부(開城府)의 수령이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고려 왕릉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져 대다수 왕릉은 그 위치를 알기 어려워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고려 왕릉이 방치되어 현종이 1662년(현종 3)에 태조 현릉을 비롯한 43개 고려 왕릉의 상태를 조사하고 보존 대책을 마련하여 『여조왕릉등록(麗朝王陵謄錄)』에 수록하였으나, 여기에 목종 의릉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이후 순조(純祖)가 1818년(순조 18)에 고려 왕릉의 능주(陵主)와 소재가 확실한 30기에 표석(表石)을 세울 때나, 고종(高宗)이 1867년(고종 4)에 고려 왕릉 57기를 조사하고 표석을 세울 때에도 목종의 의릉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릉은 현종이 개성 동쪽에 공릉을 이장하여 조영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을 뿐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어 묘제나 널방의 구조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능주인 목종은 시해된 후 시신이 화장되어 의릉으로 이장되었기 때문에 내부 널방에 목종은 관곽(棺槨) 대신 골호(骨壺) 같은 것이 배치되고, 선정왕후의 사후 시신을 합장하면서 관곽을 배치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목종처럼 신하에 의해 폐위된 왕의 경우 고려에서는 능호를 올려 주었는데, 이는 조선과는 다르다. 목종은 시해되어 화장된 후 공릉에 모셔졌다가 의릉으로 개칭하여 이장된 특이한 사례로서 의미가 있다. 고려 전기 왕릉 중 왕과 왕비가 합장된 9번의 사례 중 마지막에 해당되며, 제8대 현종비(顯宗妃) 원정왕후(元貞王后) 이후 왕후릉(王后陵)은 왕릉과 별도로 단독 조성되는 특징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 문헌에 개성의 동쪽에 조영했다고 기록만 있을 뿐 정확한 위치는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