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길수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중한민중동맹단 대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미국방공작봉사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 경기도 장단 출생으로 1905년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해 어린 시절부터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했다. 1919년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방위군에 입대하였으며, 제대 후 하와이의 구세군에 가입하여 한인구세군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이후 한길수는 하와이 내 일본인의 위협성을 고발하는 강력한 반일운동을 펼쳤다. 1938년 중한민중동맹단의 대표로 미국 본토에서 일본의 팽창위협과 전쟁음모를 폭로하는 등 활발한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길수는 1900년 5월 31일 경기도 장단에서 출생하였고, 1905년 5월 29일 부모와 함께 하와이로 이민갔다. 어린 시절부터 오아후설탕회사의 사탕수수농장에서 노동일을 하였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이승만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에서 공부한 후, 1917년부터 1918년까지 호놀룰루의 제8등급 초등학교인 칼리히와에나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방위군에 입대해 1920년 제대한 후 하와이의 구세군에 가입하여 한인구세군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1922년까지 그곳의 구세군훈련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그는 구세군의 대위로 임관되어 하와이 각지에서 봉사활동을 전개하였고, 1926년 호놀룰루에서 한인 여성인 스텔라 윤(Stella Yoon)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 하와이에서 보험외판업, 부동산 중개업 등 다양한 일을 하였다.
1932년부터 1946년까지 한길수는 하와이 내 일본인의 위협성을 고발하는 강력한 반일운동을 펼쳤고, 이후 중한민중동맹단의 대표로서 미일전쟁을 예고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미국방공작봉사원으로서 활발한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50년부터 6년간 로스앤젤레스의 동양식품주식회사 북가주 판촉원으로 근무하였다.
1956년 4월 10일 미국시민권을 획득(7545555호)한 후, 천킹회사(Chun King Corp.)에서 서부 8주의 영업부장으로 근무하였고, 1965년 6월 1일 은퇴하였다. 이후 그는 한인지하공작의 일환으로 대중국 및 대소련 소련첩보 공작과 강연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하와이의 대한인교민단이 1932년 10월 25일 한인공동회를 개최하고 특별조직으로 대한인홍보부를 설립할 때, 한길수는 단장 정두옥, 한국부 서기 승룡환, 극동부 서기 김현구와 함께 구미부 서기로 임명되어 선전외교활동에 뛰어들었다.
대한인홍보부는 국제연맹 의장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에게 청원서(1931.1.2)를 보내는 것을 비롯해 미국 후버 대통령과 남경의 국민정부 주석 임삼(林森)에게 청원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그는 1933년 3월 새로 복설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이정근 회장과 대한인홍보부 정두옥 부장과 공동 명의로 「하와이 일본인 여론조사」라는 보고서를 작성해 하와이 미육군 정보당국에 보고하였다. 이 일로 미연방조사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33년 4월부터 그는 이용직과 함께 한인혁명당이라는 사설 조직을 만들어 리한(W. K. Lyhan)이란 코드명으로 비밀정보요원으로 자칭하며 활동하였다. 그 해 7월 김규식의 하와이 방문을 계기로 개인적인 인연을 맺은 후, 그는 1935년 2월 15일자로 김규식이 속한 중한민중대동맹의 미주대표 신임장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중한민중동맹단을 설립해 스스로 대표가 되어 강력한 반일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6년 하와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 잠시 근무하며 첩보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근무로 그의 반대자들로부터 한 때 일본인의 스파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1937년 하와이에서 하와이 주 승격을 위한 미국 상하 양원합동조사위원회의 공청회(10월 6일~22일)에 참석해 하와이 내 일본총영사관의 음모를 폭로하고 증거를 제출해 미국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38년 9월 중한민중동맹단 대표로서 미국 본토로 건너가 미국 정부와 국회, 그리고 미국민을 상대로 일본의 팽창위협과 전쟁음모를 폭로하는 외교활동과 각종 강연 및 기고활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의 결과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결성될 때,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과 별도로 미국방공작봉사원이 되어 공식적인 대미외교활동을 나섰다. 그러나 선전외교활동을 둘러싸고 이승만과 충돌을 빚어 1942년 1월 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미국방공작봉사원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중한민중동맹단의 대표의 자격으로 적극적인 대미외교 활동을 펼쳤고, 그의 활동에 대해 조선민족혁명당북미총지부도 적극 후원해 주었다. 하지만 이승만과의 충돌 이후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를 비롯한 한국독립당 세력들은 한길수를 반임정주의자로 비판하였다.
한길수의 강력한 반일 및 항일운동의 영향은 미일전쟁 발발 직후 미국 정부가 1942년부터 미국 내 일본인들을 별도의 장소에 수용하는 강력한 통제정책을 펴는데 기여하였다.
해방 후 그는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유엔을 위한 비공식위원회인 대변인연구위원회(Speakers Research Committee)의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